「팡세」 18장
교회에 다녀본 사람이라면 으레 품어볼 만한 의문이 있다. 왜 우리에게는 기적이 나타나지 않고 몇몇에게만 나타날까? 왜 우리에게는 간증할 거리마저 허락되지 않을까? 왜 신은 믿음을 바라면서 우리 눈앞에 증거를 보이지 않을까? 나도 이런 의문에 지쳐서 신앙을 잃어버렸다.
그런데 기적을 직접 겪어 본 파스칼은 독특한 논변을 펼친다. "하느님은 숨어 있기를 원하셨다. 종교가 하나였다면 하느님은 그 종교 안에서 너무나 확실하게 존재하셨을 것이다. 그렇게 하느님은 숨어 계시기 때문에, 신이 숨어 있다고 말하지 않는 모든 종교는 참되지 않다. 그리고 숨어 있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 모든 종교는 가르침이 없다. 우리 종교는 이 모든 것을 한다." 즉 기적을 포함한 현현이 오히려 예외적인 일이요, 하느님의 의지와 대치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하느님께서는 정신보다 의지를 준비하기를 더 바라신다. 완벽한 명확성은 정신에는 소용이 될 것이나 의지에는 해로울 것이다. 오만을 꺾는 것." 나는 이 문장을 이렇게 해석한다. 우리는 '확실한 앎'을 획득했다고 믿으면 쉽게 오만해지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그 앎에서 나중에 틀린 부분이 발견되더라도 우리의 앎이 옳았다고 고집하는 경향도 있다. 하느님은 자신을 만물의 원인으로 치부할 뿐, 개인을 위한 증표가 되기를 원치는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어 쉽게 찬양받는 동시에 신도들을 고양시켜 오만한 인간상을 구축하는 일을 지양한 것이다. 하느님은 누군가를 위한 하느님이 아니라 모든 존재를 위한 하느님이며, 따라서 이로운 모습뿐만이 아니라 해로운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거룩한 피난처가 되시고 발에 걸리는 올가미도 되시니." 우리가 하느님을 직접 만난다면 고난 속에서 무조건 하느님에게 몸을 던지며 구원을 부르짖을 것이다. 나아가 어떤 고난에도 하느님이 무작정 자신의 편이 되어줄 것이라 믿으며 오만할 것이다. 하느님은 그런 모습들을 원치 않아 숨어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보이는 하느님을 본 자는 하느님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오만한 태도를 보일 것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발견한 자는 발견의 여정에서 본 크고 작은 체험들을 기억하며 하느님의 권위를 인정할 것이고, 동시에 자신의 미약함을 알 것이다.
이제 위의 해석들에서 내 방식대로 '하느님'이라는 말을 지워 보자. 나는 세상 만물들에게 설명서가 있는 상상을 가끔 해보곤 한다. 행성에 설명서가 달려 있으면 이 행성이 어느 궤도로 돌아가게 돼있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현미경으로 세포의 설명서를 읽을 수 있으면 생명의 원리를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 만물은 그렇게 친절하게 짜여있지 않다. 보이는 것은 단지 현상뿐, 그 안의 원리는 우리 스스로가 이해해야 한다. 진리도 파스칼의 하느님처럼 숨어 있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가 설명서를 읽고 일찍이 자연의 원리를 알았다면, 인간의 욕심은 자연을 스스로 통제하려 했을 것이다. 오만한 사람은 스스로를 설명하는 설명서를 읽을 생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을 잘못 사용하다가 파멸에 이를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은 신비한 것으로 남고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탐구하는 자세가 바람직하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 사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채 머물렀던 것처럼, 진리도 일반 의견 속에 외면적인 차이 없이 존재한다. 그렇게 성체도 보통의 빵 속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