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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너 Jun 04. 2024

[상징의 율법]

「팡세」 19장

성경을 읽을 때 흔히 하는 고민이 있다. 성경 속의 문장들은 상식적으로 터무니없는 것들이 많다. 특히 구약의 경우는 판타지 소설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성경 내에서도 설정 충돌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또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생긴 율법들이 신약의 시대에까지 이어지는 것을 생각해 보라. 과연 그것이 합당한 일인가? 파스칼은 성경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파스칼도 성경을 곧이곧대로 믿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율법은 상징이었다. 두 가지 오류 : (1) 모든 것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2) 모든 것을 영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만약에  사람들이 율법과 제사 그리고 왕국을 현실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면, 모든 구절이 일치되지 않는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그것들은 비유여야 한다."


그런데 이런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 상징이란 해석하기 나름이다. 같은 음식을 보고도 누군가는 삶을 생각할 수 있고, 누군가는 폭식이라는 죄를 생각할 수 있다. 그것들이 주어져 있지 않은 이상 상징은 아전인수 식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모든 상징들을 꿰뚫는 열쇠가 하나 있어야 할 것이다. 그 열쇠가 무엇일까?


파스칼은 성경의 모든 비유를 관통하는 핵심은 사랑이라고 본다. "사랑에 이르지 않는 모든 것은 비유이다. 성서의 유일한 목표는 사랑이다." 내 생각에는 일리 있는 주장이다. 하느님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도, 결국 인류애에 기반한다. 나아가 예수의 가르침은 직접 사랑을 운운하기까지 한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신의 권위에 복종하는 방법과 형식을 배우는 것보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한편 이 말을 수용한다면 성경 해석에 있어서 신자와 불신자를 가르는 기준은 상징을 해석할 사랑이라는 열쇠를 갖고 있느냐에 달렸을 것이다. "사람들의 일상은 성인들의 삶과 비슷하다. 그들은 모두가 자신들의 만족을 추구한다. 그들의 차이점은 어떤 대상에 그 만족감을 두느냐에 나타난다. 그 만족감을 방해하는 이들을 원수라고 부른다."


물론 이런 해석이 성경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결국 여러 사람이 쓴 글이다. 사람마다 견해와 관점이 다르고, 사랑이 아니라 순수하게 파멸의 예언을 남길 목적으로 쓴 글들도 더러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글들을 글자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자잘한 모순보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에 주목할 때에야 이 문제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성경은 인간이 쓴 하느님의 책이다. "하나의 좋은 모습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의 모든 상반되는 점을 화합시키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상반되는 점들을 화합시키지 않고 잘 조화된 특징만을 따르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한 작가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상반되는 구절을 화합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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