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느끼는 행복과 불행의 원천은 무엇일까? 그 기준이 이치로서 정해져 있어서 인간은 그것을 따르는 것일까? 파스칼은 이렇게 생각한다. "자연은 어떤 상태에서나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욕망으로 행복한 상태를 만든다. 왜냐하면 그 욕망이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상태의 즐거움을 우리의 상태와 결부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기쁨에 다다를 때 우리는 그로 인해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새로운 상태에 맞는 다른 욕구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즉 행복은 욕구의 충족을 통해 얻는 것인데, 욕구를 충족하는 순간 새로운 욕구가 생기기 마련이므로 인간은 영원히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 파스칼의 생각이다. "우리의 본성은 움직임 속에 있으며 완벽한 휴식은 없다."
이 딜레마를 조금이나마 해소할 방법이 있다. 자신의 욕구, 즉 자신의 생각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각각의 것이 그 자체로는 전체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죽으면 그에게 있어 모든 것이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각자가 모든 것에 자신이 전체라고 믿는 일이 일어난다. 우리의 기준으로 자연을 평가해선 안 된다. 자연에 따라 그것을 평가해야 한다." 욕구란 자연이 자신에게 준 것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을 주관적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주관을 내려놓고, 자연이 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만족하려는 지혜를 발휘하면 그나마 나을 것이다.
자신을 내려놓는 태도는 실용적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유효하게 나무라며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보여 주기를 원할 때는 그가 어느 쪽에서 문제를 보는지 관찰해야 한다. 왜냐하면 보통 그쪽에서는 그것이 진실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가 옳음을 인정하고, 문제가 진실이 아닌 측면을 보게 해야 한다. 그는 이것에 만족한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잘못 생각하지 않았으며 단지 모든 면을 보지 못했을 뿐이라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모든 것을 보지 못한 것 때문에 화를 내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보통 사람은 모든 것을 볼 수 없으며 자신이 보는 측면에서는 스스로 잘못을 행할 수 없다는 점에서 오는 결과이다. 마치 감각의 인지가 항상 진실인 것처럼 말이다."
다만 자신만이 옳다는 착각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연에 반(反)하여 솟아오르는 자신의 욕구를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 그런 것들을 껴안는 한 인생은 괴로운 것인데도 말이다. 또 내가 양보한다고 해서 남들이 나의 태도를 배우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한 사람의 겸손은 많은 사람의 오만을 낳는다." 지혜로운 태도가 명백한데도 지혜롭게 살기란 정말 어렵다. 그러므로 파스칼은 덕을 위한 조언으로 이 말을 전한다. "abstine et sustine. (참고 인내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