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 3
이번 글에서 몽테뉴는 죽음에 대해 심도 있게 고찰한다. 제목의 '저 너머'부터가 저승을 가리키는 것 같다.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생각한다. 아니, 죽음같은 먼 미래로 갈 필요도 없이 미래를 당장 어떻게 결정할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미래를 고민하며 전전긍긍한다. "우리는 편안하게 제 집에 머무는 적이 없고 늘 저 너머로 나가 있다. 두려움, 욕망, 희망은 우리를 미래로 집어던지며, 지금 있는 것을 느끼고 생각하지 못하게 하며 앞으로 올 일, 심지어 우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의 일에까지 정신을 팔게 한다. '미래를 근심하는 영혼은 불행으로 짓눌린다.'(세네카)"
죽고 나서의 일은 본인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이 헛되다시피 한 생각에 마음을 쏟는다. 몽테뉴에 의하면 이런 생각이 순기능을 부르는 때도 있다. 바로 정치이다. 왕은 자신의 명성을 사후에 평가받게 돼있다. 그러므로 위대한 왕으로 기억되려면 그만큼의 공덕을 살아있는 동안 쌓아야 한다. 어떤 결정이든 무작정 지지하고 보는 아부쟁이 신하에 기대지 않고 사후의 명성을 생각하고 올바르게 처신하려는 마음가짐이 유도되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 이후를 생각하는 습성은 쓸데없는 허례허식으로 번지기도 한다. 이 문제는 죽음을 본격적으로 준비하는 과정에서 두드러진다. 끝까지 체면치레를 하기 위해 자기가 죽으면 시신에 속바지를 입히라고 지시한 막시밀리안 1세, 뜬금없이 죽을 때만 구두쇠가 되어 검소한 장례식을 치른 귀족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들은 살아있는 동안 누린 명성을 죽는 순간까지, 혹은 죽은 이후까지 일관되게 유지하려는 욕심 때문에 우스꽝스러운 일을 저지른 것이다. 사실 장례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대로 사자가 아닌 생자를 위로하기 위해 행하는 것임에도 말이다. 몽테뉴는 키케로의 말을 인용하여 "장례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조금도 애쓸 필요가 없는 일이고, 자기 가족을 위해서는 소홀히 해서는 안 될 일이다."라고 주장한다. 즉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 타인이 원하는 모습이 장례에 있어서는 더 적절하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또한 자신의 장례를 묻는 크리토에게 "자네들 좋을 대로 하게."라고 간단히 말했을 뿐이다.
많은 이들을 생사의 경계에 내모는 전장에서 이 문제는 더 두드러진다. 전사들은 영원히 전사로 남기기 위해 비상식적인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자신의 시신을 부적처럼 삼게 한 전사들은 그래도 용기를 북돋는 효과라도 유발했다. 하지만 사후까지 남을 명성을 위해 치르지 않아도 될 싸움을 하고 비효율적인 전술을 사용한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몽테뉴는 아테네인들을 강하게 비판한다. 아테네 인민들은 적을 무찌르고 돌아온 용사들이 아군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승전 영웅들을 죽음으로 내몬다. 이 사례가 남아서 나중에 낙소스섬 싸움에서 승리가 눈앞에 있는데도 아테네 해군 제독 카브리아스는 적을 격멸하지 않고 퇴각하게 놔두고 시신을 수습한다. 그리고 나중에 그 대가를 치르게 됐다.
이렇듯 미래, 특히 죽음을 의식해서 현명하지 못한 행동을 한 사례들이 많았다. 미래를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몽테뉴는 고대 철학자들을 인용한다. "플라톤에서 자주 언급되는 위대한 가르침은 네 일을 하고 너를 알라는 것이다. 두 부분으로 된 이 가르침은 각각 우리의 의무 전체를 담고 있으며 하나가 다른 하나를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자기 일을 하려는 사람이라면 첫 번째로 알아야 할 것이 자기가 누구이고, 자기에게 적합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를 아는 사람은 자신과 무관한 일을 자기 일로 삼지 않고,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하고 가꾼다. 헛된 일이나 쓸모없는 생각과 계획을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어리석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도 만족하는 일이 없는 것처럼, 지혜는 지금 있는 것에 만족하며 결코 자신을 불만스럽게 여기지 않는다.'(키케로) 에피쿠로스는 현자에게는 미래에 대한 예견이나 염려가 없다고 말한다."
이제 내 감상을 말해보려 한다. 나는 솔직히 죽음을 많이 접해보지는 못했다. 죽은 친인척이 있기는 하지만 임종 현장에 있지 않아 그분들의 마지막 모습이 어땠고 마지막 바람이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내 기억 속에 그분들은 죽기 직전의 쇠약한 모습이 아니라 가장 많은 추억을 선사하던 시절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아직 그런 사례가 없지만, 만약에 나를 학대하던 사람이 죽는다면 그 당시의 심술궂은 모습으로 평생 기억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사람은 임종 직전이나 장례식 때의 모습이 아니라 가장 깊이 접촉했을 때의 모습으로 기억에 남는 것 같다. 몽테뉴의 지적대로 과도한 장례 문화와 추도는 헛된 것을 넘어서 해악일지도 모르겠다.
나도 사후에 명예로이 기억되고 싶은 욕심이 있다. 솔직히 누구나 그럴 것이다. 다만 그런 욕심을 충족하기 위해 인위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면 자괴감을 느낄 것 같다. 원치 않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내 모습이 과연 내가 진정 원하는 모습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는 생각에 모순을 느끼고 괴로울 것 같다. 그러면 미래의 나를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최근에 읽은 「데이비드 코퍼필드」가 생각난다. 주인공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미래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항상 무언가에 쫓기고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 신세였다. 그럼에도 그는 대성했다. 살기 힘든 와중에도 명성을 쫓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선택한 길이 매번 그 앞에 놓인 현재에 있어서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소설 속 인물이라고 하면 와닿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대문호 찰스 디킨스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쓴 작품이니 그의 삶이 그런 식으로 굴러갔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 모습은 몽테뉴가 플라톤을 인용하여 말한 것과 비슷하다.
결국 몽테뉴의 말처럼 중요한 것은 '지금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챙기는 것'인 것 같다. 물론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지는 않겠지만, 그것이 자신의 본연에 거슬리는 것이면 그다지 좋을 것이 없다. 당장 필요한 것들을 충족해나가다 여유를 얻으면 그때부터 남을 위해 베풀며 나중을 생각해도 된다. 미래는 내 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당장 어떻게 할 수 없다. 그저 어떤 미래든 문제없이 맞이할 수 있도록 지금의 자기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찾아서 걷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의 나는 내일의 나의 씨앗이다. 씨앗이 다 자라고 나서 어떤 모습일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씨앗에 물을 줘야 자란 모습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