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에 관하여

「에세」 2

by 루너

제목 그대로 몽테뉴는 이번 글을 통해 슬픔에 대해 논한다. 본문의 주석에서 지적하듯이, 정확히는 슬픔 자체를 정의하고 고찰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이 개인에게 주는 영향을 관찰하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커다란 기쁨이 주는 영향까지 관찰하니, 제목을 '과한 감정에 관하여'로 짓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다.


몽테뉴는 슬픔의 특징을 둘로 규정한다. 첫째로 슬픔에는 한계치가 있다는 것이며, 둘째로 이 한계치를 넘어설 경우 사람은 그 슬픔을 감추지 못하게 되고 심한 경우 아예 굳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 예시로 프사메니투스가 딸과 아들의 비극적인 몰락을 보고도 침착하다가 끝내 끌려온 친지를 보고 괴로움을 감추지 못한 일, 샤를 드 기즈가 맏형과 아우의 죽음을 견디다 끝내 수하의 죽음에 넋을 잃은 일, 독일 대장 라이샤크가 아들의 시신을 보고 얼어붙어 쓰러져 죽은 일을 든다. 몽테뉴는 한계치에 이르지 못해 몸의 반응으로 드러나지 않는 슬픔을 "작은 슬픔들은 말하고, 큰 슬픔은 침묵한다."라는 세네카의 말을 인용하여 설명한다. 마찬가지로 한계치를 넘어가는 기쁨 또한 그런 효과를 야기한다고 설명한다. 이 사례로 소포클레스와 참주 디오니시우스, 칸 전투에서 생환한 아들을 보고 기뻐 죽은 로마 여인 등을 예시로 든다.


몽테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허약함인 것 같다. 인간은 이성을 가진 생물이지만 감정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차오르면 이성은 뒤로 물러나고 육신까지 감정의 지배를 받게 된다. 위대한 사람의 생명마저도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픽 꺼져버린다. 그래서 몽테뉴는 슬픔이라는 감정 자체를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슬픔은 언제나 해로우며 언제나 분별없다."라는 말까지 사용할 정도이다. 몽테뉴 자신은 격렬한 감정에 사로잡히는 일이 거의 없다고 밝히며, 그 비결로 날마다 이성적 성찰로 감정을 덮어씌워 무디게 만드는 방안을 공개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못 견뎌서 일을 그르치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당장 학창 시절을 돌아봐도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과 쾌락을 못 견뎌서 사고를 치고 큰 벌을 받은 사례를 수십 가지 떠올릴 수 있다. 마찬가지로 며칠이 지나도 해소되지 않는 슬픔에 빠져서 그 슬픔과는 관련 없는 일까지도 그르치다가 완전히 몰락하는 일 또한 많이 봤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원인을 하나 지목하여 그것에 대해서만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걸어온 길과 걸어야 할 길에 놓인 모든 것을 비관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몽테뉴가 슬픔에 대해 그 정도로 단호하게 말한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없다. 슬픔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니 해악처럼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슬픔이라는 감정을 인위적으로 억누르는 것보다 슬픔을 극복하고 더 나은 것을 쟁취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이 슬픔과 맞서 싸워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나는 그런 예시 또한 제법 많이 보아왔다. 이성은 감성에 파묻힐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고 감성의 무게를 이겨냈을 때 이성은 더 커지고 위대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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