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4
제목이 너무 길어서 자르는 수밖에 없었다. 이번 글의 제목은 「정념의 진짜 대상을 놓쳤을 때, 영혼은 어떻게 그 정념을 엉뚱한 것에 풀어놓는가」이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화풀이 하는 것에 관하여' 정도가 될 것 같다. 몽테뉴는 이렇게 고찰한다. "동요되어 움직이기 시작한 마음은 붙잡을 것을 주지 않으면 제 안에서 길을 잃고 마는 것 같다. 그래서 항상 기대어 작용할 만한 무언가를 마음에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몽테뉴가 드는 사례가 유독 재미있다. 의사가 소금간을 한 육류를 금지하면 순대와 햄에 대고 저주를 퍼붓는 귀인도 있다. 크세르크세스 황제는 보스포루스해(海), 그러니까 바다를 후려치고 욕설을 퍼부으라는 명령을 내리고 아토스산(山)에 결투장을 보냈다. 키루스 왕은 긴두스강(江)을 느낄 때 공포를 느낀 것을 되갚아주려고 강에 복수를 명령했다. 당사자들은 심각했을 것이다. 자신에게 공포를 주고 손해를 끼친 존재에게 제대로 복수할 법이 없으니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한 일이었을 것이다. 소용 없는 것을 내심 알면서도 그래야만 직성이 조금이나마 풀렸을 것이다. 하지만 후대에 기록으로 이 일을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바보같이 보일 뿐이다. 사실 후대까지 갈 것도 없다. 철학자 비온은 명장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며 자기 머리를 쥐어뜯는 왕을 보고 "저 양반은 털을 뽑으면 슬픔이 경감될 줄로 생각하는가."라고 꼬집었다고 한다.
몽테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닥친 불행에 대해 무슨 까닭이든 꾸며 내 붙여 보려 하지 않는 일이 있는가? 옳건 그르건 덤벼들 대상이 필요해서 아무것에나 분풀이를 하지 않는 일이 있는가? 그 불행한 탄환을 발사해 네가 그토록 사랑하던 동생을 죽게 한 것은 네가 쥐어뜯는 금발 머리채도, 분한 마음에 벌게지도록 그리도 가혹하게 두드려대는 새하얀 가슴도 아니다. 다른 데 화를 내라." 우리는 사건의 단초를 알면서도 이미 시간이 흘렀기에 그 단초를 어떻게 할 방법이 없을 때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그럴듯한 원인을 새로 꾸미고는 한다. 특히 그 단초가 자기 자신이 내린 잘못된 판단이라면, 자기 자신을 탓하는 대신에 남을 죄인으로 몰아간다. 그러고는 아무 소용 없는 복수를 하고 자신의 감정을 풀어댈 뿐이다. 물론 바보같은 짓이다. 사건의 단초를 추적해서 해결하는 것이 이성적인 판단이다. 그러나 이걸 몰라서 이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몽테뉴는 "돌아가는 일들에 결코 화를 내서는 안 되느니. 그것들은 우리의 분노에 아랑곳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우리 정신의 무절제에 대해서는 아무리 욕을 퍼부어도 충분치 않으리라."라고 말한다. 무엇이 현명한지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현명한 판단만 내릴 수 없는 정신의 무절제함이 어리석음의 근원이다.
그렇다, 인간은 완벽한 생물이 아니니 어쩔 수 없다. 역사에 남은 바보같은 모습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과오에 대해 매번 교묘한 변명을 준비하고는 한다. 그래서 발전하지 못한다. 나는 사건을 똑바로 직시하고 내 과오를 똑바로 살피는 자세를 키워야겠다. 그러나 이런 태도 자체가 잘못됐다고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런 태도 자체가 인간으로부터 자연스레 뿜어져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를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허용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