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위된 우두머리에 관하여

「에세」 5

by 루너

이번 글도 제목이 정말 길다. 원제는 「포위된 곳의 우두머리가 협상을 위해 성 밖으로 나서야 하는지에 관하여」이다.


싸움에서 필요한 것은 두 가지이다. 힘과 지혜이다. 그런데 이 둘 중 무엇이 우선인지는 역사의 흐름에 따라 꾸준히 변해왔다. 고대에는 힘이 우위였고, 「군주론」 이후로는 지혜가 우위에 섰다. 이번 글을 통해서 그러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몽테뉴는 고대인들의 전투 사례를 소개한다. 유럽을 제패한 로마인들은 힘을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상대의 배신자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제안을 내밀더라도 정정당당한 선택지를 택하겠다며 거절했다. 플로루스라는 사람은 "덕스럽고 지혜로운 자라면 진정한 승리는 정직성도 명예로움도 저버리지 않고 거두는 승리뿐임을 알아야 한다." 이런 태도는 몽테뉴의 시대에 와서 퇴색했다. "사자 가죽으로 충분치 않을 경우에는 여우 가죽을 조금쯤 덧대야 한다."라는 말이 당대의 태도를 대변한다.


그럼 이런 변화 속에서 몽테뉴가 제목에서 제기한 질문, 즉 '포위된 곳의 우두머리가 협상을 위해 성 밖으로 나서야 하는가?'에 대해 어떤 답을 내릴 수 있을까? 고대였다면 이런 행동 자체가 미심쩍은 것으로 치부됐을 것이다. 협상을 해서 휴전 기간을 확보하고 그동안 힘을 회복한 루시우스 마르시우스의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힘과 힘이 부딪혀야 하는 전장에서 계략으로 시간을 번 셈이니 고대인의 관점에서 이런 승리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반면 계략에 관대해진 몽테뉴의 시대에서는 이 행동에 윤리적인 문제는 없을 것이다. 로마의 베르길리우스는 "용기이건 계략이건, 싸우는 사이에 아무려면 어떤가?"라는 말을 남겼는데, 당대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겠지만 몽테뉴의 시대에서는 멋진 말이 된 것이다. 그러니 어떤 전략을 가지고, 즉 믿는 구석이 있는 상태로 협상을 위해 성 밖으로 나서는 것이라면 오히려 치하 받을만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도덕의 역사성을 본다. 선악은 태초부터 명확히 구분된 것이 아니다. 선악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기준에 의해 좌우된다. 그리고 그 기준은 당대 사람들이 공유하는 인식에 의해 좌우된다. 과거에는 비난받아 마땅했던 행위가 현대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으로, 오히려 지혜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래서 윤리는 명제화할 수 없다. 옳고 그름은 당대의 기준에 의거한 것이지, 수학처럼 절대적으로 참과 거짓으로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윤리에 관해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말할 수 없으니, 당대의 기준에 그런대로 맞춰주거나,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해야 할 것이다.


한편 이 글의 말미에서는 특별한 얘기가 나온다. 앙리 드 보는 바르텔르미 드 본의 공격에 의해 성에 갇혀있었다. 바르텔르미 드 본은 앙리에게 당신 스스로를 위하는 일이니 나와서 협상을 하자고 촉구했다. 그래서 앙리는 성 밖으로 나왔는데, 그때 자신이 지금 갇힌 성의 꼴이 얼마나 참혹한지 깨닫게 됐다. 앙리는 항복했다. 이 사례의 경우, 바르텔르미 드 본이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계략은 앙리가 진실을 마주하게 했다. 더 이상의 희생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상대가 스스로 깨닫게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전술적 효과와 윤리적 효과를 동시에 얻은 것이다. 몽테뉴는 "나는 다른 사람의 약속을 쉽게 믿는다. 그러나 내가 기꺼이 그 사람의 진실함을 믿어서가 아니라 절망적인 상황에 용기가 없어서였다고 혹 남들이 생각할 여지가 있을 때는 마음이 쉬 내키지 않을 것이다."라고 밝힌다. 앙리 드 보의 사례는 마지막 문장의 전형적인 사례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이 그러할 때는 마음이 내키지 않더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뚝심과 고집은 종이 한 장 차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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