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 11
「에세」를 읽다 보면 몽테뉴를 비롯한 철학자들의 말이 시대를 초월하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데, 오늘 읽은 글이 특히 그랬다. 오늘 읽은 글은 제목 그대로 예언에 관해 다룬다. 현대에는 예언을 믿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그러나 예언을 믿는 소수가 매우 강력하게 믿기 때문에 곤혹스러운 일이 일어나고는 한다. 몽테뉴의 시대 또한 그랬던 것 같다.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면 로마 시대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예언의 객관성은 차치하더라도, 사람들이 적중했다고 주장하는 예언들을 보면 그 예언 자체가 모호해서 해석하기에 따라 다른 경우가 많다. 몽테뉴는 이렇게 지적한다. "매듭을 엮고 풀듯 하는 이런 미묘한 일에 숙달된 사람은 어떤 글에서건 자기들이 원하는 바를 찾아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리저리 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은 무엇보다 예언에 담긴 묘한 말들이 애매하고 흐릿하며 엉뚱해서이다. 후세 사람들이 마음 내키는 대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도록 예언서의 저자들은 명확한 의미를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적중한 예언이 존재한다는 사실만 신경 쓴 나머지 예언의 적중률을 고려하지 않는 실수도 많이 범한다. 키케로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종일 활을 쏘고 있다 보면 몇 번쯤 과녁을 맞추는 일이 왜 없겠는가?" 가끔 인터넷을 보면 항상 틀린 말을 하던 사람이 어쩌다 맞는 말을 하고, 그러면 댓글에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라는 말이 나타나고는 한다. 그 시대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똑같은 것 같다. 우리는 고대와 비교해서 그렇게 두드러지게 현명해지지는 않았다.
재미있는 일화가 나온다. 디아고라스는 무신론자였다. 그가 사모트라케 섬에 방문했을 때, 누군가 난파선에서 생존한 자들이 그곳 사원에 바친 서원과 도판들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자 보시오, 신들이 인간사를 돌보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당신은 신들의 은총으로 목숨을 건진 이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하시오?" 디아고라스는 이렇게 응수했다. "물에 빠져 익사한 사람들은 저기 그려져 있지 않은데, 수적으로는 그 사람들이 훨씬 많다오."
우리는 미래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확실하게 유리한 행동을 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나 안다고 해서 미래가 변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오히려 예언은 운명을 고정함으로써 인간을 위축되게 한다. 루카누스는 이렇게 한탄했다. "올림푸스의 주인이여, 그대는 왜 다가올 운명의 타격을 섬짓한 징조로 미리 알게 하여 인간의 불행에 이런 번민까지 더해 주려 했는가? 그대의 계획이 무엇이든 불시에 급습하라, 우리 운명을 어둠의 장막으로 감싸라, 그리하여 두려움 속에서도 희망이 인간의 권리로 남게 하라." 이렇게 보면 예언은 희망을 제거한다. 싸우지도 못하고 얻어맞을 각오만 하게 하니 예언을 이로운 것으로 볼 이유가 없다.
예언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할까? 예언은 믿을 만한 것도 아니며 믿어서 좋을 것도 없다. 그래서 호라티우스는 두 개의 잠언을 남겼다. "지혜로운 신은 미래의 일을 짙은 어둠으로 감춰 두며 필요 이상으로 불안해하는 인간을 조롱한다. 날마다 '오늘 하루 잘 살았다, 주피터가 내일 하늘에 검은 구름을 드리우건 빛나는 태양을 뜨게 하건 내게 무슨 상관이랴.'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제 운명의 주인이고 삶을 행복하게 누리는 자이다." "현재에 만족하는 우리 영혼은 내일 무슨 근심이 있을지 괘념치 않으리." 운명의 주인은 예언자가 아닌 자기 자신임을 기억해야 한다. 미래는 누군가가 외력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행동에 달린 것이며, 설령 자기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미래가 있다 해도 알아서 그다지 좋을 것이 없으니 현재의 자신의 행동에 집중하는 것이 낫다.
그래서 몽테뉴는 예언이라 여겨지는 사례들 중 유일하게 소크라테스의 사례를 긍정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안에 어떤 목소리가 있어서 선택의 기로에서 특정 행동을 하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몽테뉴는 이를 소크라테스가 가진 잘 훈련된 영혼이라고 생각했다. 즉 미래를 내다보는 힘이 아니라 좋은 미래를 향하는 판단력이 소크라테스에게 있던 것이다. 잘 훈련된 영혼의 목소리는 이성보다 앞서서 판단하고, 또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즉 믿을 수도 없고 믿는다고 해도 어쩔 도리가 없는 미래를 믿느니,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현명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판단력을 갈고닦으며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 현명하다. 이것이 몽테뉴의 의견이자, 내가 이 글을 읽기 전부터 은근히 갖고 있던 의견이다.
후세의 사람들이 괜히 「에세」에서 몽테뉴가 아닌 자신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몽테뉴와 나는 「에세」를 통해 같은 곳을 똑같이 바라볼 수 있는 친구가 되어가고 있으니, 얼마나 놀라운 체험인가. 이것이 독서가 가져다주는 순기능이다. 이제 나는 몽테뉴가 제시한, 예언보다 올바른 지혜들을 흡수해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