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 12
요즘의 군대는 정신전력 교육을 강조한다. 적의 공격이 언제 닥칠지 모르니 심적으로 대비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매주 북한의 도발에 관한 영상을 시청하며 결의를 다지고는 한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긴장감을 유지하라는 말도 들었다. 솔직히 전투보다는 용사들과의 동고동락이 군 생활의 초점이었다. 하지만 교육을 받으며 죽음이 내 곁에 항상 있다는 것을 느낄 때면 의연함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목숨을 잃을 수 있다니, 그것도 가족 품이 아닌 전장에서 잃을 수 있다니... 운명의 부조리는 병영 부조리와는 비교조차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전역을 한 지 얼마 안 돼서 몽테뉴의 「의연함에 관하여」를 읽는다. 역사에 전쟁이 없던 적이 없으니 몽테뉴가 소개하는 사람들 역시 나와 비슷한 문제를 겪는다. 죽음이 눈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하는가를 두고 의견이 갈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의연함을 유지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의연함을 유지하기에는 죽음은 너무도 큰 사건이다.
몽테뉴가 제기하는 질문은 구체적으로 이것이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은 의연한 것으로 볼 수 없는가?" 몽테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답한다. 만약 그 몸부림이 전술적인 것이라면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막을 수 있는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것을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후퇴도 막연히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역습을 위한 것이라면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러나 본인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뻔한데도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은 얘기가 다르다. 예를 들어 기동력이 없는 사람이 날아오는 포탄을 막아보려고 손을 드는 것은 웃음거리다. 물론 순간적인 공포에 몸이 반응하여 동요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그러나 몽테뉴에 의하면 현자는 그런 공포를 순간적으로 느끼더라도 금방 이성적으로 자신의 상황을 판단하고 공포에 동요하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현자도 마음의 동요를 면치 못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다스린다."
그러나 나는 죽음이라는 사건 앞에서 의연함을 따지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살아있는 동안 많은 것을 이룩했고 앞으로도 해낼 일이 많은 사람들은, 즉 자신의 충실한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죽음을 피하고 싶기 마련이다. 여기서 이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일종의 체념이 아닐까? 살 수 있는 방법을 이미 알고 그 방법대로 침착하게 행한다면 의연하다고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살 수 있는 방법이 보이지 않아도 행운에라도 기대려는 심정으로 무엇이든 해보려는 것을 비판할 수 있을까. 미래는 자기 손으로 어쩔 수 없다지만, 그렇다고 가능성이 아예 보이지 않는다고 생존을 아예 체념하는 것은 조리에 맞지 않은 것 같다.
삶의 일관성은 물론 중요하다. 죽음을 예외로 두면 오점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은 예외적으로 거대한 사건이다. 그러니 죽음을 면죄부로 쓰지는 못하더라도, 죽음을 피해보려는 발버둥까지 물고 늘어질 필요는 없지 않을까? 설령 그것이 무의미한 것이라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