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고 나쁜 것은 우리 견해에 달려 있다

「에세」 14

by 루너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몽테뉴는 빈곤, 고통, 죽음 세 가지를 예시로 든다. 아마 모든 독자들이 공감할 것 같다. 몽테뉴는 이번 글에서 그것들에 대한 걱정이 얼마나 쓸데없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것들에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지 논한다.


우선 셋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죽음일 것이다. 그런데 몽테뉴가 보기에 죽음을 걱정하는 것은 인간다운 일이기는 하나 이치에 맞는 일은 아니다. 몽테뉴가 보기에는 죽음에 대한 걱정 자체가 이성의 잘못된 판단이다. 역사를 보면 절개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차라리 죽음을 선택한 사례도 수없이 많다. 죽는 순간까지 의연함과 위트를 잃지 않은 사례도 수없이 많다. '죽음'이라는 똑같은 결과를 두고 여러 사람이 다른 태도를 취하고, 심지어 죽음을 반기기까지 하는 것은, 결국 핵심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 마음이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과정, 그리고 죽고 나서의 세상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죽음이 두려운 것이다. 실상 죽음은 찰나에 불과한데 말이다. 몽테뉴는 유명한 일화를 인용하는데, 어쩌면 다른 책에서 '퓌론의 돼지'라는 이름으로 인용되는 것을 본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화는 다음과 같다. "철학자 퓌론이 어느 날 배를 타고 가다 큰 풍랑을 만났다. 그는 그의 곁에서 잔뜩 겁을 먹은 사람들에게 거기 있던 돼지들을 가리키며, 돼지들은 폭풍을 전혀 염려하지 않는 점을 들어 그들을 격려했다." 종 사이에 우열을 말하는 것 자체가 마뜩잖게 여겨질지도 모르겠지만, 보통 인간은 돼지보다는 나은 존재로 여겨지기 마련이다. 이는 인간만이 갖고 있는 도구인 이성에 기인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성이 인간에게 죽음이 다가오고 있으며 이것은 무서운 것이라고 생각하게 (혹은 착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 앞에서 돼지보다 침착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 고통은 어떤가? 죽음은 순간이며 겪기 직전까지 상상의 영역에 속한다지만 고통은 길고 실재한다. 퓌론의 돼지들도 풍랑이 아니라 채찍이 눈앞에 있었다면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몽테뉴가 보기에는 고통에 대한 걱정 또한 무의미하다. 첫째로 고통 또한 각자의 인내력에 따라 감내할 수 있는 정도가 다르다. 마음을 수양함으로써 고통에 대한 내성 또한 높일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고통'이라는 단어가 주는 위압감에 비해 고통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마조히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정신에 내리는 도전을 말하는 것이다. 평탄한 삶을 반기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평탄한 삶 속에서 아무런 성장도 하지 못하고 정체될 것을 생각한다면, 기꺼이 난관이 깔려 있는 길을 택할 사람도 많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잘한 고통은 우리를 해치지 못하기 때문에 극복할 만한 것이고, 큰 고통은 죽음이 끝내줄 것이니, 어느 쪽이든 섭리를 따라 마음을 정하면 될 뿐이다. 따라서 몽테뉴가 보기에는 고통도 마음먹기에 따라 다른 것이니 전혀 걱정할 것이 아니다.


셋째로 빈곤은 어떤가? 여기서 몽테뉴는 자신의 경험을 고백한다. 몽테뉴가 고정된 수입이 없어 타인의 결정과 도움에 의존해 지내던 시절, 몽테뉴는 근심이 없었다. 오히려 지불할 때마다 귀찮은 짐을 내려놓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특히 없는 살림에 돈을 올바르게 사용할 때는 도덕적 쾌감을 더 크게 느꼈다고 한다. 그러다 돈을 갖게 되자 걱정이 시작됐다고 한다. '사고로 가진 돈을 잃을 수도 있지 않을까?' '통상적인 지출보다 늘 많이 갖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몽테뉴는 이 걱정들에 사로잡혀 저축을 무분별하게 많이 했다고 한다. 저축한 돈이 도움이 된 경우는 없었지만, 그래도 만일을 대비해 인색해졌다고 한다. 세네카는 "부의 한복판에서 궁핍한 것이 가난 중에서도 가장 힘든 가난이다."라고 말했다는데, 몽테뉴가 바로 이런 상태였던 것 같다. 그러다 돈을 버는 것보다 그것을 지키는 것이 더 힘들다는 것을 깨달으니 부의 사용법이 보이기 시작한다. '지출과 수입을 나란히 달리게 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지출이 앞서고 어떤 때는 수입이 앞서지만, 현재의 일상적 필요를 채우기에 충분한 것을 지니고 있음에 만족하고 재산을 더 갈구하지 않게 된 것이다. 즐거움을 위한 것에만 돈을 쓰고 쓸모 없는 것에는 돈을 쓰지 않게 됐다. 키케로의 "구매 열정을 갖지 않는 것도 하나의 부요, 탐욕스레 사지 않는 것도 수입이다."라는 말을 실천하게 된 것이다. 결국 빈곤을 극복하게 하는 것은 지혜이다. 빈곤 자체가 괴로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빈곤에서 우리 이성이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압박감이 괴로움을 주는 것이니, 우리의 즐거움을 위해서만 소비하는 지혜를 갖추면 빈곤 또한 별것 아닌 것이다.


결국 몽테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인간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에 대한 견해 때문에 번뇌에 빠진다." "우리가 불행 또는 고통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 자체로서 불행이나 고통이 아니고, 단지 우리 생각이 그 사물에 그런 성질을 부여한 것이라면 그것을 바꾸는 것도 우리에게 달려 있다." "행복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행복하다." 우리 말로 치면 '일체유심조'가 이번 글을 관통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나는 이번 글에 솔직히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 요즘 시대에는 신념을 저버릴 바에 차라리 죽음을 택한 사람들이나 피할 수 있는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는 사람들이 드물다. 몽테뉴가 늘어놓은 예시는 놀라움을 주기는 하지만 이제 옛이야기가 돼버렸다. 옛날에는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고 가르쳤지만 요즘에는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라'라고 세상이 말하는 듯하다. 또 정신을 갈고닦아 죽음과 고통을 쉽게 견디는 사람들도 이제 보이지 않는다. 애초에 그런 경지에 이를 때까지 수양에 성공한 사람을 본 일이 없다. 어떻게 보면 몽테뉴의 얘기는 요즘 시대의 사람들이 쉽게 공감하기 어려운 이야기인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몽테뉴의 조언을 흘려들을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몽테뉴가 소개하는 사례들이 예전에는 가능했던 일이라면 지금도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몽테뉴가 말한 사례들이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나오고 있기는 하다. 어쩌면 요즘 시대에는 몽테뉴의 방식으로 수양하는 것이 어려워졌을 뿐 몽테뉴의 말이 무의미하지는 않다는 방증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사실 「에세」나 스토아 철학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테니까.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았던 그들로부터 삶의 요령을 발굴하고 그들이 제시한 태도를 받아들여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는 것이 현명하리라고 본다.


나는 특히 몽테뉴가 언급한 도전 정신에 공감한다. 사실 몽테뉴는 육체적 고통에 초점을 두고 글을 쓴 듯 하지만 나는 정신적인 측면에서 그의 말에 공감했다. 나도 한때는 평탄한 삶을 원했다.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세상에서 멈춘 듯이 살아도 되는 삶을 원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삶을 견디기가 오히려 난관으로 점철된 삶을 견디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신적으로 아무런 고비가 없는 것이 오히려 권태를 일으켜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었다. 내일의 내가 오늘의 나보다 아무런 발전도 없을 것이며, 이대로 가다가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내가 받은 사랑들에 비해 허무하게 사라져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정신적 도전을 받아들이게 됐다. 덕분에 내 삶은 이전보다 오히려 즐겁다.


몽테뉴의 경제관도 배울만하다. 친구들을 보면 소비 유형이 제각각인데, 나는 양극단 모두 보았다. 언젠가는 쓸모가 있겠지 하고 필요 없는 것도 마구 사들이다가 돈에 쪼들리는 사람도 보았고, 반대로 언젠가는 쓸모가 있겠지 하고 모든 돈을 저축하다가 돈은 못 쓰고 인심만 잃는 사람도 보았다. 신기하게도 직장에 들어가기 전에는 전자였다가 직장에 들어가서는 후자가 된 한 사람을 본 적도 있다. 이렇게 보면 현명한 소비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만 사고 미래를 필요 이상으로 그리지 않는 소비인 것 같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면서 비트코인 시세만 쳐다보는 사람들 중에 자신이 경제적으로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없다. 언젠가 행복해질 것이라는 믿음에 홀린 사람들은 많이 보았지만.


결국 '좋고 나쁜 것은 우리 견해에 달려 있다.'라는 말이 맞는지 확인하려면 내 삶에 이 말을 적용해 보는 방법밖에 없다. 이 말이 내게 이익을 준다면 계속 실천해나가면 된다. 이 말이 효과가 없다면 다른 관점을 찾아보면 된다. 아직 내게 주어진 시간은 많다. 물론 언제 깡그리 없어질지는 모르고, 아직은 이런 걱정을 억누르기 어렵지만, 일단은 이 말대로 내 감정을 다스리는 연습을 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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