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 18
몽테뉴는 감정이 이성을 가려서 현명한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경우를 자주 비판한다. 오늘 읽은 글 또한 그런 맥락이다. 그런데 몽테뉴는 죽음에 대한 걱정은 헛된 것이라고 단언하면서도 공포만큼은 '다른 어떤 시련보다 가혹한 것'이라며 그 위력을 인정한다.
이번 글에서 몽테뉴는 공포에 질려서 기이한 판단을 한 사람들을 소개한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에 적진인지 아군의 진지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적진으로 뛰어든 사람, 도망치다가 다른 사단이 방금 도망쳐 나온 곳으로 도로 돌아간 사단, 아예 공포에 얼어붙어서 마비된 황제...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읽다가 삼국지에서 죽은 제갈량이 산 사마의를 물리치는 장면이 생각나기도 했다. 분명 후세 사람들이 읽으면 웃긴 이야기이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그만큼 심각했을 것이다. 이걸 보고 웃는 후세 사람들도 그런 상황이 오면 더한 굴욕을 겪을 지도 모른다. 공포란 그런 것이다.
공포가 절정에 달하는 순간은 언제일까? 몽테뉴는 '우리의 책임감과 명예심에서 뽑아내 제거해 버렸던 바로 그 격정으로 우리를 다시 던져 넣을 때'라고 답한다. 한마디로 '도망치기 위해 정면돌파를 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이러면 눈에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게 된다. 로마인들은 카르타고의 한니발에게 패배한 첫 번째 전투에서 격렬한 공포에 사로잡힌 나머지, 퇴로가 보이지 않자 적들 사이로 뛰어들어 수많은 카르타고인들을 살해하며 길을 뚫었다고 한다. 그 정도 힘이 남아있더라면 그 힘으로 퇴로를 뚫을 것이 아니라 승리를 찾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판단은 불가능하다. 공포는 가슴에서 모든 이지(理知)를 앗아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의 행동을 자주 비웃고는 한다. 특히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불합리한 행동을 하는 것을 비판한다. 그러나 공포는 강한 감정이어서 쉽게 극복할 수 없다. 몽테뉴조차 공포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가장 공포스러운 것이 공포라고 말할 정도이다. 나는 이 글을 읽고 공포를 비웃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동시에 공포를 다스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조금 더 고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