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행복은 죽은 뒤에나 판단해야 한다

「에세」 19

by 루너

오비디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누구든 그 마지막 날을 기다려 봐야 한다. 모든 것을 끝내는 죽음이 오고 장례를 치르기 전까지는 아무도 행복했다고 단언할 수 없는 법." 솔론은 크로이소스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인간사는 불확실하고 변화무쌍해 사소한 일 하나로도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치닫게 되는 법이니 아무리 억세게 운이 좋아 보이는 사람일지언정 그 사람 생애의 마지막 날에 이르기 전에는 함부로 행복한 이라고 부를 수 없다.' 몽테뉴는 이 가르침들과, 생애 후반에 운명의 장난으로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전락한 이들의 사례를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 생애의 다른 모든 행위를 이 마지막 한 획에 비춰 가늠해 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날은 다른 모든 날들을 심판하는 지고의 날이며, 옛사람이 말했듯이 내 지난 모든 세월을 심판하는 날이다."


나는 이 말 자체에 동의하지만, 행복의 판단을 최후까지 미뤄두어야 한다는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사람은 매 순간 느껴지는 행복 없이 살 수 없다. 만약에 비참한 결말을 맞는다고 해도 이전에 행복했던 기억이 있더라면 그것이 위안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중도에 겪는 행복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물론 행복의 등급을 나눌 수 있다면 최후에 인생 전체를 돌아보며 만족했다고 말할 수 있는 행복이 최상의 것일 테다. 하지만 그것이 중급의 행복이 열등하다고 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 글을 통해 삶의 중간의 행복이 영원할 것이라 믿고 자만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얻기도 하였다.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운명은 막대한 부와 짧은 수명을 동시에 줄 수도 있다. 인간은 앞일을 내다볼 수 없다. 다만 어떤 앞일이 오든 지혜로이 대처할 수 있도록 자신을 수양할 수 있을 뿐이다. 또 삶의 중간에서 어떤 모습을 보였건 마무리가 좋으면 좋게 기억되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죽은 유명인을 돌아볼 때 생전에 이룬 업적과 최후의 모습을 동등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그것이 유명인의 죽음이 상품화되기 쉬운 이유이기도 하다.


죽음은 사람의 민낯을 드러낸다. 죽음 앞에서 자신의 진국을 드러내어 인정받는 삶이 좋은 삶이라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중간중간의 만족을 평가절하 하고 싶지는 않다. 거기에 안주해서도 안 되겠지만, 중간에 얻은 행복의 기세를 몰아 쭉 행복한 모습으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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