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 20
이전에 플라톤의 「파이돈」을 읽은 적이 있다. 「파이돈」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거기서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태연하게 마신다. 죽음으로써 육체의 탐욕과 고통에 묶여 있던 영혼을 해방하고, 이상적인 사후세계로 자유로이 떠난다는 즐거움까지 느낀다. 나는 그것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물론 내가 그리스의 신을 믿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세상에 못다 한 일들과 남겨지는 사람들에게 일말의 아쉬움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 기이했던 것이다. 그래서 내심 그가 부러웠다. 나도 죽음 앞에서 소크라테스처럼 초연한 태도를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영혼과 사후세계가 믿어지지 않아서 실패했다.
소크라테스 사후 오랜 세월이 지나서 몽테뉴는 「에세」를 썼고, 「파이돈」을 읽고 오랜 세월이 지나서 나는 몽테뉴의 글을 읽는다. 몽테뉴 역시 죽음에 대해 초연한 태도를 보인다. 그런데 그 비결이 소크라테스가 말한 것과는 제법 다르다. 그는 영혼과 사후 세계에 관해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은 피할 수 없다. 몽테뉴가 보기에 피할 수 없는 것을 걱정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나는 죽음 자체보다 우리가 그것에 덮어 씌운 무시무시한 얼굴과 치장들이 더 겁먹게 한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그러니 그 치장을 벗기고 죽음을 직시해야 한다. 그러면 그것이 삶의 끝에 위치한 찰나의 순간임을 알게 되며, 죽음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을 수 있다.
흔히들 "삶의 목적은 즐거움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철학자들은 보통 즐거움에 차등을 둔다. 육체적 쾌락을 채우는 즐거움은 정신적 쾌락을 채우는 것보다는 질이 낮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몽테뉴는 정신의 즐거움을 채우기 위해 철학을 하다 보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성으로 죽음을 바라보면 상술한 것처럼 죽음은 걱정거리가 못 된다. 더구나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준비를 미리 해둘 수 있다. 그 준비란 삶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는 것이다. "너희의 인생이 어디서 끝나건, 거기까지가 전부이다."라는 대자연의 말을 기억하고 자신의 명이 허락한 범위를 넘는 계획을 미리 파기하는 것이다. 몽테뉴의 표현을 빌리면 죽음을 경멸하되 삶 또한 멸시하는 것이다.
몽테뉴는 죽음을 준비하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한다. 그는 호라티우스의 시구를 인용한다. "하루하루가 너를 비추는 마지막 날이라고 상상하라. 그러면 네가 기대하지 않았던 시간을 감사히 받으리라." 언제나 죽음이 옆에 있다고 생각하고 지금을 충실하게 보내자는 것이다. "정신 바짝 차리고 노력하는 것이다. 축제나 즐거운 일 중에도 항상 우리의 조건을 거듭 기억하며, 우리의 그 희열이 얼마나 많은 방식으로 죽음에게 과녁을 제공하고, 죽음이 얼마나 사방을 공략하며 우리의 희열을 위협하는지 때때로 상기되지 않을 만큼 넋 놓고 즐거움에 빠지지는 말자." 또 세상과 작별할 준비를 늘 깔끔하게 해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가급적 언제나 신발 끈을 매어 두고 떠날 채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그때가 왔을 때, 오직 나 자신 이외에는 걸린 문제가 없게 해두어야 한다." 그렇게 '좋은 죽음'이라는 목표를 가진 삶은 매 순간이 충실하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떠나더라도 아쉬움이 남지 않는다.
나는 죽음 앞에서도 초연한 현인들의 태도가 부럽다. 어린 시절 나는 죽음에 대한 걱정으로 잠을 못 이룬 적이 많다.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죽음은 무겁고 무서운 존재였다. 그런 내가 할 수 있던 것은 죽음이 하루라도 늦게 오게 해달라는 기도뿐이었다. 그때보다는 미약하게나마 원숙해진 지금은 그 공포가 조금 덜해졌지만, 그래도 죽음에 대한 걱정을 완전히 떨칠 수 없다. 몽테뉴의 말을 들으면 죽음에 대한 공포가 누그러지는 느낌이 들기는 한다. 죽음이 필연이면, 죽음에 대한 공포로 지금의 즐거움을 억누르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다. 피할 수 없는데 즐기지도 못한다니, 얼마나 불쌍한가. 나는 몽테뉴의 태도를 배우고 싶다.
다만 내가 죽음을 걱정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내 죽음이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남기는 상처가 무서운 것이다. 그들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또 내가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영원한 이별이 남기는 상처를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에는 초연해지더라도 남의 죽음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보장이 있으면 모두가 안심할 수 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