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 22
"상인은 젊은이의 낭비가 있어야만 장사가 잘되고, 농부는 밀값이 비싸야, 집 짓는 이는 집들이 무너져야 돈을 번다. 사법관들은 사람들 사이의 소송과 분쟁이 있어야 일거리가 있고, 성직자들의 활동과 영예조차 우리 죽음과 악덕의 덕을 본다. 의사란 자기 친구의 건강조차 달갑게 여기지 않으며, 병사는 자기 고장의 평화마저도 기꺼워하지 않는다고 고대 그리스의 한 희극 작가는 말했다. 다른 일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더 나쁜 것은, 각자 자기 속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내적인 소망들이 대개 남을 희생시키며 생기고 자란다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는 것이다."
제목의 명제를 쉽게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떤 것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에게 받아야 한다. 안타깝지만 이것은 섭리이다. 그래서 탐욕이란 타인의 불행을 바라는 마음이라고들 하며 비난하지만 실은 누구나가 은연중에 남의 불행을 바라고 있다.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몽테뉴는 이것이 자연의 섭리이기 때문에 거스를 수 없다는 말만 할 뿐 어떤 해결책도 주지 않는다. "어떤 사물이 변화해 그 본성이 바뀌면, 그 즉시, 전에 존재했던 사물의 죽음이 초래되기 때문이다."라는 루크레티우스의 말이 진리라고 확인해 줄 뿐이다.
나는 이것이 사실이고 바꿀 수 없다면, 차라리 관점을 바꾸는 것이 어떤지 제안해 본다. 나의 이득이 타인의 손해이고 타인의 이득이 나의 손해라고 생각한다면, 차라리 나와 타인을 동등하게 보자는 것이다. 이렇게 묶인 공동체 속에서 구성원의 손해는 곧 다른 구성원의 이득이 되므로,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보다 넘치게 버는 미세한 이익이 축적되어 공동체가 더 나아질 가능성도 고려할 수 있다. 물론 이런 관점을 취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결국 사람은 공동체에서 위안을 받지만 개인으로서 살기 때문이다. 이렇게 공동체적인 관점을 사용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고, 이것을 강요한다면 개인을 말살하는 부작용을 낳는다. 실제로 현대 사상사는 공동체를 해체하고 개인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주류였으니 말이다.
결론은 이러하다. 서로가 서로의 불행을 바랄 수밖에 없는 사실을 어떻게 해석할지를 두고 열리는 이 재판 자체가 잘못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