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 23
이번 글도 제목이 길어서 짧게 간추렸다. 원제는 「습관해 대해, 그리고 기존의 법을 쉽게 바꾸지 않는 것에 관하여」이다.
습관은 무섭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한 번 정착하면 판단할 새도 없이 행동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몽테뉴는 이렇게 표현한다. "습관은 우리가 모르는 새에 조금씩 우리 안에 자기가 행사하는 권위의 발판을 세워 놓는다. 이처럼 유순하고 눈에 띄지 않게 일단 시작하고 나서는 시간의 도움을 받아 그것을 고정시켜 단단히 박아 넣은 뒤, 이윽고 폭군의 성난 얼굴을 우리에게 드러내며, 그 앞에 선 우리는 감히 눈을 들어 올려다볼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몽테뉴의 지적처럼 익숙함은 감각을 무디게 한다. 몽테뉴는 예시로 우리에게 천체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드는 오류를 범했지만(천체의 소리를 전달할 공기 같은 매질이 없기 때문에 천체의 소리를 생각할 수 없다.), 아무튼 어떤 일이 익숙해지면 어떤 감흥도 일으키지 못하고 나중에는 아예 당연한 것이 되는 것이 순리이다.
습관은 힘이 강하기 때문에 개인의 습관을 올바르게 함양하자는 것은 당연한 교훈이다. 플라톤도 "습관이란 절대 사소한 일이 아니다."라며 아이의 습관을 강하게 경계했다고 한다. 몽테뉴 또한 교육을 통해 나쁜 습관을 미리 뿌리 뽑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악덕은 그 악한 본질 때문에 미워할 수 있도록 아이들을 정성으로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몽테뉴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집단의 습관, 즉 관습에 주목한다. 그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친다. "무엇인가에 익숙해지면 우리가 지닌 판단력은 졸기 시작해 그 시력이 약해진다. 야만인들이 우리에게 괴상해 보이는 것이 우리가 그들에게 괴상해 보이는 것보다 결코 더하지 않으며, 우리 생각에 더 정당한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시대를 굉장히 앞서나간 문화상대주의를 보여준다.
몽테뉴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상당히 기괴한 예시들을 열거한다. 죽은 자의 시신을 익혀 죽처럼 될 때까지 갈아서 술에 섞어 마시는 지역, 가장 바람직한 장례가 개에게 먹히는 것인 지역, 신녀들을 지키는 내시들은 매력 없는 남자로 남아 있도록 코와 입술을 베어버리는 지역, 물고기를 신으로 여기는 사람들... 이런 것들은 우리 입장에서 '상식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이 상식에 위배되는지 알 수 없다. 이것은 철학이나 천성의 문제가 아니라 관습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천성으로 타고난다고 말하는 양심의 계율들은 습관에서 비롯된다. 누구나 자기 주위에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견해나 풍속을 마음으로 존중하는 까닭에, 거기서 벗어나게 되면 회한을 느끼고 그것을 잘 따르면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다."
나는 이 의견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 관습의 힘이 강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므로 관습은 변명이 되기 쉽다. 관습은 자신의 행동을 반성할 때 장벽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관습을 바라보는 우리의 잣대 또한 관습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예절 중 대부분은 당초의 의도가 잊혔지만 계속 지켜지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 아닌가. 나도 중학생 시절 서양 식사 예절을 배우며 '이 사람들은 왜 이리 머리 아프게 식사를 할까?'라는 생각을 한두 번 한 것이 아니다. 나의 교양은 남에게는 무의미한 겉치레로, 나의 야만은 남에게는 나름대로 배려 섞인 행위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몽테뉴는 이것을 존중하자는 것을 넘어서 다소 위험한 말을 한다. 즉 모든 관습을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혜로운 인간은 자기 영혼을 세상의 소란으로부터 빼어내어 자기 안으로 돌이켜, 만상을 거침없이 판단할 수 있는 자유와 권능 안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외적인 것들은 기왕에 받아들여진 방식과 관례를 온전히 따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몽테뉴의 논조는 이러하다. '어떤 법을 개혁하려 친다면 그 법이 지지하고 있는 나라의 모든 기반을 흔들기 때문에 개혁으로 얻는 이익보다 혼란으로 얻는 손실이 더 크다. 그러므로 공권력에는 순종하는 것이 옳다.'
나는 이 말을 읽고 플라톤의 「크리톤」이 생각났고, 몽테뉴도 그 얘기를 한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판결에 불복하지 않고 담담히 공권력의 판단에 복종한 것은 유명하다. 이 모습 때문에 그가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했다는 소문이 생기기도 했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받아들인 이유는 자신이 법을 넘어섬으로써 법이 유명무실해지는 것, 그리고 조국을 배신하는 것이 더 큰 해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충분히 일리 있는 의견이다.
그러나 나는 안정도 중요하지만 발전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공권력, 특히 민주정의 민중이 늘 옳은 판단만 하는 것은 아니다. 안주하다가 더 나은 것을 포기하고 마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세계사를 돌아보며 우리가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안주하지 않고 혼란을 감수하고 도박을 해서 성공해왔기 때문이었다. 악법은 법이긴 하지만 고쳐야 할 법이다. 소크라테스가 재림할 때마다 죽일 것인가?
나는 몽테뉴의 말을 이렇게 수정하고 싶다. "지혜로운 인간은 자기 영혼을 세상의 소란으로부터 빼어내어 자기 안으로 돌이켜, 만상을 거침없이 판단할 수 있는 자유와 권능 안에 두어야 한다. 외적인 것들의 관례에 의문을 품는다면 소신을 품고 나서서 자신의 의문이 공론화되도록 민중을 설득해야 한다." 이는 막연히 뒤집자는 말이 아니다. 기존의 관례를 취지를 바탕으로 존중하되, 문제가 되는 부분을 수정해서 더 완벽하게 개선하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앞에서 지적됐듯이 야만과 문명은 시각의 차이이기 때문에 과연 자신의 새로운 시각이 옳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느냐고 지적할 수 있다. 나는 그래서 핵심을 '설득'에 둔다. 모두가 관습을 바꾸는 데 동의한다면, 최소한 독단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혁이 혼란을 일으킨다는 지적 역시 타당한 것이기 때문에, 완충 작용을 할 수 있는 무언가를 늘 생각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