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 25
나는 가끔 내 지식이 정녕 내게 쓸모 있는 것인지를 자문하곤 한다. 물론 지식을 모으는 한 언젠가는 쓸 일이 있을 수 있으니, 지식의 축적 자체가 비판받을 것은 못 된다. 패러데이도 자신의 발견이 무슨 쓸모인지 묻는 사람에게 "갓 태어난 아기가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라고 반문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영영 쓸모를 찾지 못하면 나는 패러데이와 똑같은 반문을 날릴 수 없다. 아쉽게도 지금까지는 그 쓸모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몽테뉴의 이번 글은 더욱 의미가 남다르다. 몽테뉴는 삶에 영향을 전혀 주지 못하는 배움을 비판한다. 그 논거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남이 만든 지식을 주워 담다가 자신의 견해를 내는 법을 잊어버리는 현상이다. "강한 데다 크기도 한 남들의 두뇌를 그렇게 많이 담아 두려다 보면, 정작 자기 것은 남들 것에 떼밀리고 짓눌려서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나머지 하나는 지식을 쌓아도 지식을 활용하지 못하는 답답함이다. "우리는 기억의 창고를 채우려고 애쓸 뿐, 이해력과 생각은 텅 빈 상태로 내버려 둔다."
몽테뉴는 당대의 지식인층을 통렬히 비판한다. 그들은 옛 철학자들이 하는 말은 줄줄이 외울 수 있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말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우리는 키케로가 이렇게 말했다거나, 플라톤의 도덕론이 어떻다거나, 이게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이다라거나 하는 식의 이야기는 잘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은? 우리는 무슨 말을 하나? 우리가 내리는 판단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행하는 것은 무엇인가? 남의 말이야 앵무새라도 곧잘 할 테니 말이다." 차라리 당대의 지식인들보다는 그런 지식이 없는 외부의 침략자들이 더 낫다고 논평하기까지 한다. 적어도 외적들은 용맹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성취를 꾸준히 내는 반면, 지식인들은 선현의 말만 반복할 뿐 아무것도 새로운 것을 내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지식인이라기보다는 '글멍청이'라는 칭호가 어울릴 정도이다. "내 보기에 로마는 아는 것이 많아지기 전에 더 용맹스러웠다."
반면 시대를 초월해 위대하다고 여겨지는 현인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활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단지 그 자신들의 목표는 활용이 아니라 탐구여서 활용에 무게를 두지 않았을 뿐이다. 아르키메데스가 자신이 발견한 원리를 이용해 시라쿠사를 방어한 것도 유명하고, 도형을 그리다가 죽은 것도 유명하지 않은가. 결국 말보다는 행동이 세계를 움직이게 돼있다면, 아는 것을 바탕으로 무언가 행동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세계를 움직일 수 없으리라.
그렇다면 우리는 배움을 통해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몽테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남들의 견해, 남들의 지식을 쌓아 두고만 있을 뿐, 그것으로 끝이다. 그것을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의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지식의 파편들은 모아봤자 파편들일 뿐이다. 그 지식들을 판단과 행동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키케로 또한 "지혜를 얻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니, 그 지혜에서 유익한 무엇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몽테뉴는 판단력과 덕성을 강조한다. 이것들은 오로지 자기 자신이 갖고 있으며 외부에 전수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고상한 품격은 남들이 한 고상한 말들을 입으로 외울 때가 아니라 행동에 각인해서 자신의 말을 만들어낼 때 발휘된다.
나는 이번 글을 읽고 이전부터 들던 의문이 강해졌다. 나는 매일 몽테뉴의 글을 읽고, 자주 철학자들이 남긴 고전을 읽는다. 그 결과로 달라진 것이 있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솔직히 아직까지는 없다고 답하는 수밖에 없다. 남들은 내가 쓰는 언어에서 품격이 배어 나온다고 치켜세워주기는 하지만, 내가 철학을 통해 인생에 임하는 태도를 바꿨다고 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나는 무엇을 위해 배우는지,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를 재차 고민할 때가 온 것 같다. 특히 나는 과학을 배우는 학생인데, 과학을 삶의 태도에 적용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이 주제는 오래전부터 생각해오던 것이고 뾰족한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과연 내 배움을 어떻게 사용할 것이며, 그 결과 나는 어떤 인간이 될 것인가... 무겁지만 두근거리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