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교육에 관하여

「에세」 26

by 루너

이번에 읽은 글은 특이하게 수필이 아니라 편지 형식이었다. 첫아이를 기다리는 절친한 집안의 신부에게 쓴 것이라고 한다. 제목 그대로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할지 다루는 이 글은 내가 이전에 받았던 교육의 모습들과 사뭇 다른 형태의 교육을 권장한다. 놀랍고 공감되는 부분도 많았지만, 시대의 차이인지 이견이 생기는 부분들도 많았다. 이번 나의 글에서는 공감되는 점과 공감할 수 없는 점을 가감 없이 말해보려 한다.


몽테뉴는 저번에 읽은 「현학에 관하여」에서 피력한 의견을 연장한다. 분별 없이 머릿속에 쌓아둔 남의 말들은 의미가 없으며, 그것들이 합쳐져 자신의 의견이 됐을 때라야 배움에 의미가 생긴다는 것이 저번 글의 메시지였다. 이번에 몽테뉴는 그 말을 그대로 적용하여 아이들이 선생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스스로 생각하는 형식으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키케로를 인용한다. "가르치는 자의 권위는 흔히 배우려는 자에게 해롭다." 나는 이 말을 읽고 어린 시절 만화에서 본 서당의 이미지가 생각났다. 만화 속에서 훈장은 '공자 왈 맹자 왈'만 반복시키고 외우지 못하면 때릴 뿐, 아이들이 이를 바탕으로 자기만의 말을 하도록 이끄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어린 내가 보기에도 그들의 공부는 허황되어 보였다. 재현에 중점을 둔 만화가 아니기 때문에 이 모습이 실제로 있었던 광경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몽테뉴의 시대의 학교는 '아리스토텔레스 왈'을 가르치며 실제로 그런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얼마나 답답하게 보였을지 공감이 크게 가는 대목이었다.


선현들의 말을 외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말속에 배어있는 선현의 정신을 체화시키는 것이다. 몽테뉴도 이렇게 말한다. "그들의 교훈을 배울 게 아니라 그들의 정신에 젖어들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원한다면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는 과감하게 잊어버리되,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 줄 알게 해야 합니다. 진리와 이성은 누구에게나 공통이요, 처음 말한 사람의 소유도, 나중에 말한 사람의 소유도 아닙니다. (중략) 벌은 이 꽃 저 꽃에서 꿀을 따 오지만, 그것으로 순전히 제 것인 꿀을 만듭니다. 그 꿀은 이제 백리향도 꽃박하도 아니죠. 그와 마찬가지로 학생은 다른 이에게서 빌려온 조각들을 변형시키고 섞어서 완전히 자기 것인 작품, 즉 자신의 판단력을 만드는 것입니다. 가르침, 숙제, 공부의 목표는 오직 자신의 판단력을 형성하는 데 있습니다." 몽테뉴의 이 지적은 굉장히 날카롭다. 외우는 것과 아는 것은 다르다. 언제든지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무심히 실행할 수 있을 때, 지식은 지혜로 거듭난다.


그런데 몽테뉴는 이를 연장해서 오로지 덕, 즉 철학만이 학교에서 가르쳐야 할 것이라는 식으로 주장한다. 철학이 무엇을 원해도 좋은지, 돈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 얼마만큼 조국과 가문에 헌신해야 하는지 등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몽테뉴는 나머지 학문, 이를테면 천문학 같은 것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모르는 한 전혀 쓸모가 없기 때문에 가르치는 것이 어리석다고 주장한다.


공감하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학교에서 수학과 과학을 배우고 많은 지식을 쌓은 아이들이 정작 그 배경이 되는 창의력은 결여되어 있고, 자연의 섭리에 관해 아무런 의견도 없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배우는 것이 무익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것들로부터 감흥을 얻고 전공을 선택하는 아이들이 여전히 있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 없이 나만 해도 세포 속의 소기관들이 정교하게 대화하며 생명을 유지하는 것에 매료되어 전공을 생명과학으로 선택했고, 조화의 비밀을 밝히는 데 관심을 두며 많은 것들을 깨달아나가고 있다. 다른 분야에 관해서도 비슷한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요지는 이것이다. 배움의 유용성은 절대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삶이 결정한다. 개인에게 천성적으로 맞는 지식을 찾다 보면 어차피 귀결은 진리를 향할 것이다. 물론 이 경우 개인에게 맞는 분야를 찾아주기 위해 교육자들이 더 힘을 써야 할 것이다.


다만 몽테뉴가 어조를 누그러뜨려 현대 교육에서 덕에 대한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더라면, 나는 완전히 동의했을 것이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혜가 삶의 지혜와 동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요즘의 교육 과정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가 받은 교육을 예로 들자면 나는 사회 시간에 수요와 공급의 법칙은 배웠지만 합리적인 소비에 대해서는 배운 바가 없다. 나와 같은 세대의 아이들이 소비를 유독 절제하지 못하는 것에는 이런 배경도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얘기로 넘어가면, 몽테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학생에게는 방 안이나 정원이나, 식탁이나 잠자리나, 혼자이거나 함께이거나, 아침이나 저녁이나, 모든 시간이 똑같이 중요하고, 모든 장소가 교실이 될 것입니다." 이 말은 굉장히 타당하다. 중요한 것은 선생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선생을 찾는 마음을 어디서든 유지하는 것이다. 어디서든 배울 수 있다는 이 말은 공자의 말과 통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대화할 때만 해도 우리는 단순히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넘어서 서로에게서 대화의 기술을 배우고 대화 속에 있는 메시지를 배우고 있지 않은가.


몽테뉴는 자신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교육이 이상적이었다고 회고한다. "아버지는 다른 무엇보다 강요받지 않은 의욕으로 스스로 원해서 학문과 공부를 맛보게 하고, 엄격함이나 강요 없이 아주 온화하고 자유로운 상태에서 내 영혼을 키워 주라는 충고를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글을 마친다. "어린아이의 교육에선 욕구와 열의를 북돋워 주는 것 만한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책을 잔뜩 짊어진 당나귀밖에 만들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매질을 해서 학문을 잔뜩 욱여넣은 주머니를 아이들에게 주고 잘 간수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학문이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는, 그것을 담아 두기만 해서는 안 되고 그것과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이 마지막 논변에 대해 특별히 덧붙일 말이 없다. 완전히 공감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다만 나처럼 과학을 배우는 사람은 이 가르침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감을 잡기 어렵다. 몽테뉴는 덕을 기르는 좋은 교과서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추천한다. 나는 과학자들의 열전이라도 살펴봐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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