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 42
몽테뉴의 사상은 보면 볼수록 놀랍다. 일전에 그는 「식인종에 관하여」 등의 글로 파격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몽테뉴는 글을 통해 꾸준히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가 추구하고 누리는 것들은 헛된 것이며,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내력을 보고 사람을 판단해야 한다.' 이번에 읽은 글에서도 몽테뉴는 비슷한 얘기를 한다. 놀랍게도, 이번에는 신분제를 뛰어넘어 사람의 본질을 보자고 말한다. 16세기라면 신분제가 매우 두드러지는 시기였을 텐데 자신의 철학으로 시대를 뛰어넘은 목소리를 낼 수 있다니, 그 점이 무척 존경스럽다.
몽테뉴는 인간만 빼고 다른 모든 것이 오직 그 자체의 자질만으로 평가된다고 지적한다. 말을 볼 때는 힘과 재주를 보지 마구를 칭찬하지 않고, 사냥개를 볼 때는 속도를 보지 목걸이를 칭찬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다른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치장을 본다. 사람의 자질이라고 한다면 이성과 마음일 텐데, 그것들보다는 신분 같은 부수적인 것을 보고 평가하는 우를 범한다.
몽테뉴가 보기에 신분은 오히려 제약이다. 루크레티우스가 말하길, "자연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고통 없는 신체와, 근심과 두려움을 벗어나 평안을 누리는 마음뿐이다." 신분에서 나오는 권력은 자연에서 요구하는 것보다 많은 것을 요구한다. 권력자들은 오히려 자신을 둘러싼 비겁과 시샘에 둘러싸여 공포스러워한다. 아랫사람들을 잘 이끌어나가야 한다는 책임감도 너무 무겁다. 셀레우코스 왕은 이렇게 말했다. "왕홀의 무게를 아는 자는 그것이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봐도 주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 아랫사람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도 없다. 환심을 사기 위한 말일 수 있기 때문이다. 율리아누스 황제는 신하들이 그의 공정함을 칭송하자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달리 행동했을 때 나를 비난하고 책망할 수 있는 인사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면 기꺼이 그대들의 칭송을 자랑삼으련만." 어찌어찌 자신의 소유를 지킨다고 해도 건강한 몸과 마음이 없으면 이를 누릴 수 없다. 이 문장이 나의 뺨을 때렸다. "소유가 아니라 향유해야 우리는 행복해진다."
나는 누군가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시샘해서 "내가 저 사람보다 잘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일을 많이 보았다. 그런 사람은 나중에 높은 자리를 차지하면 십중팔구 전임자와 다를 바 없이 쩔쩔맨다. 자신이 했던 모욕과 똑같은 모욕을 듣는 수치를 겪기도 한다.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는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권력을 얻어 마음을 가릴 수 있는 도구를 많이 갖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본질을 잊으면 삶은 고통에 빠지기 마련이다. 몽테뉴는 마지막 문장으로 코르넬리우스 네포스의 말을 인용하는데, 정말 좋은 말이다. 나도 그 말을 똑같이 인용하며 글을 마쳐야겠다. "각자의 성격이 각자의 운수를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