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 54
난 처음 이 글을 읽을 때 몽테뉴가 제목 그대로 쓸데없는 묘기를 부리는 사람들을 비판하려는 줄 알았다. 읽다가 보니, 몽테뉴가 비판하려는 대상은 따로 있었다. 몽테뉴의 집에서 '양 극단에서 공히 통용될 수 있는 것을 누가 더 많이 찾아낼 수 있는가 하는 내기'를 한 모양이다. 참 기묘한 묘기 대결이다. 아무튼 몽테뉴는 내기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극과 극은 통하고, 그 중간에 끼어 있는 것은 해롭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혜로운 이들은 불행을 억눌러 제어하고, 어리석은 자들은 불행을 모른다. 다른 예로 욕망과 포만은 서로 성질이 다르지만 똑같이 고통을 유발한다. 무지에는 학식을 갖기 전의 초보적인 무지도 있지만 학식을 얻은 뒤에 오는 샌님의 무지도 있다. 이런 예시로부터 몽테뉴는 극과 극은 통한다는 결론을 귀납했다.
몽테뉴가 왜 중간을 혐오했는지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충분히 길게 설명돼있지 않다. 몽테뉴는 이렇게 말한다. "정신력도 능력도 어중간한 계층에서 그릇된 의견이 생겨난다. 그들은 그럴싸해 보이는 초보적인 의미를 추종하면서도, 짐짓 권위 있게, 우리가 옛 방식을 고수하는 것을 단순하고 우매한 것으로 해석한다. 배움이 없어 그런 일에 정통하지 못한 것으로 얕잡아 보면서 말이다." 내 생각에 몽테뉴는 중간을 혐오했다기보다 주관이 없어 그럴듯해 보이는 남의 주관을 자신의 주관인 양 말하는 것을 혐오했던 것 같다.
만약 내가 이해한 것이 옳다면, 몽테뉴도 일리가 있기는 하나 너무 성급히 생각했다고 본다. 중간은 극단이 되기 전의 상태이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사람들은 나름의 선택을 할 것이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모든 사람은 대부분의 사람들로 태어나서 한 명의 사람으로 죽는다." 중간의 사람들은 이미 극단에 다다른 다른 사람들로부터 학습하다가 자신만의 길을 정할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새로운 극단이 될 것이다. 몽테뉴의 우려는 선택을 기다려주기만 하면 해결될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