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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에 관하여

「에세」 56

by 루너

나는 뉴스에서 지옥에 떨어지면 좋을 종교인들을 많이 본다. 이들은 자신의 비행을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하지만, 경전에 있는 신의 말이 아무리 중의적이라도 비행을 지시하는 구절은 없다. 이들의 신앙은 신에 대한 존경이 아니라 자신의 식욕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몽테뉴도 이런 사람들을 강한 어조로 비판한다. "죄와 판관을 찰떡같이 사이좋은 동반자로 같은 집에서 키우며 그토록 평안할 수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 양심인가?"


몽테뉴의 말처럼 기도는 "양심에서 우러나야 하는 것이지 말로만 읊조려선 안 된다." 신의 가호를 받으려면 신의 뜻에 우선 따라야 바람직할 것이다. 예수가 인류애를 설파했으면 예수의 뜻에 따라 인류를 사랑해야 한다. 불신자를 배척하고 공격하는 것은 잘못됐다. 인류애의 대가로 무언가를 받는 것은 사랑을 실천한 다음의 일이다.


몽테뉴는 한 발 더 나아가 신에 관한 이야기는 신학자만이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기 좋을 대로 신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솔직히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과격한 의견이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현대 시대에 신에 대해 논할 자격은 누구나 있다. 몽테뉴와 나의 세대 차이이다. 하지만 몽테뉴의 심정을 이해한다.


그래서 종교인들의 솔선수범이 중요하다. 신학자의 평소 행실이 정당해야 신학자의 말을 믿을 수 있다. 신의 말에 이견을 제시하고 논쟁을 일으키는 것이 두렵다면, 획일화된 질서를 그들이 먼저 보여주어야 한다. 신이 지시한 사랑은 실천하지 않고 사람이 신을 먼저 사랑하라고 가르친다면 순순히 따르기 어렵다. 모범을 보인 뒤 똑같이 살라고 하면 훨씬 신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 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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