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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행동의 변덕스러움에 관하여

「에세」 58

by 루너

일관성은 사람을 비판할 때 유용한 도구이다. 어떤 사람의 행적을 두고, "이전에는 그러지 않았으면서 지금은 왜 그런가?"라고 묻는 것이다. 확실히 일관성 있는 삶은 훌륭한 것이다. 나름대로의 원칙이 확고하고, 원칙을 지키려는 의지가 확고한 것이니, 두 개의 확고함을 갖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경지에 이른 사람은 역사적으로도 거의 없다.


데모스테네스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덕의 시작은 반성과 숙고이며 그 끝과 완성은 확고부동이다." 그러나 욕망은 우리의 방향을 이리저리 틀어놓는다. 몽테뉴는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휩쓸려 간다. 부유물처럼, 물이 거세냐 잔잔하냐에 따라 때로는 순하게, 때로는 격하게." 몽테뉴는 자기도 여러 조각의 누더기라고 고백한다.


이렇게 보면 모순은 비판거리가 못 된다. 오히려 모순은 인간의 상징이다. 일관성은 초인의 상징이기 때문에 일관성을 존경할 수는 있다. 초인을 닮아 자신의 의지가 곧 선의지가 되도록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존경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범인에게 일관성이 없다고 지적하는 것은 가혹하다. 몽테뉴는 독자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밖으로 드러난 행동만 가지고 우리를 판단하는 것은 사려 깊은 이해의 방식이 아니다. 속까지 탐사해 보고, 어떤 원동력에 의해 유발된 동요인지 봐야 한다."


나는 이 글을 통해 개인적으로 용기를 얻었다. 나는 행동을 하기 전에 내 과거를 뒤져서 이전의 내 모습과 일관돼있는지 살피는 습관이 있다. 일관성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가 비난받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일관성을 존경하기 때문에 나는 변함없이 일관성을 추구할 것이다. 그러나 내 모습이 모순이라 해서 슬퍼하지는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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