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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아 섬의 관습에 관하여

「에세」 60

by 루너

자살은 두 이미지를 갖고 있다. 하나는 자기 자신에게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죄라는 이미지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의 풍파로부터 자신을 명예롭게 보호하는 행위라는 이미지이다. 전자의 경우 궁지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떠올리지 못하자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살하는 것이 예시이다. 후자의 경우 여인이 자신을 겁탈하려는 사람들을 피할 도리가 없자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살하는 것이 예시이다. 몽테뉴는 다양한 사례를 검토하며 '자살이 명예로워지는 기준'을 찾는다. 몽테뉴가 마지막에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참을 수 없는 고통 그리고 자살보다 못한 죽음의 위협이 내 보기엔 가장 용납할 만한 자살 동기일 것 같다."


자살은 아직까지도 미해결된 논제이다. 예를 들어 어떤 나라에서는 죽을 때까지 존엄함을 지켜주기 위해 조력 자살을 합법화한 반면 대다수의 국가에서는 그렇지 않다. 또 한 자살에 대한 의견도 굉장히 엇갈린다. 논란을 일으킨 연예인의 자살을 두고, 누군가는 출구 없는 고통에서 빠져나갈 유일한 방법이라고 동정하는 한편, 다른 누군가는 논란을 끝까지 헤쳐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단념한 것이라며 비판하니 말이다.


나는 몽테뉴의 기준에서 '참을 수 없는 고통'은 인정한다. 세상에는 정말로 개인이 어떻게 손쓸 수 없는 고비가 있기 마련이다. 물론 고통을 참을 수 없다고 섣불리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 자살이 쉬운 일이 돼서는 안 된다. 하지만 '자살보다 못한 죽음의 위협'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어떤 사람을 바라보는 잣대는 그 사람의 생애 전체이지 죽음의 순간이 아니다. 몽테뉴가 여러 글에서 주장하듯 죽음이 대수롭지 않은 사건이라면, 죽음을 구분해서 자신한테 편리한 죽음만 취하는 것도 헛일이다.


제목에서 말하는 '케아 섬의 관습'은 일종의 존엄사이다. 케아 섬의 어떤 지체 높은 여인이 자살을 결심하고 자살을 참관할 손님들을 모았다고 한다. 어떤 설득도 그녀의 결심을 철회하지 못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독을 들이켰다고 한다. "나로 말하자면, 항상 운수의 호의적인 얼굴만 봐 왔으니, 너무 오래 살고 싶어 하다 그 반대의 얼굴을 보게 될까 두려워, 행복한 결말로 내 영혼의 남은 생명과 하직하고, 두 딸과 손자 손녀를 남겨 두고 갑니다." 본인은 이 죽음을 행복하게 받아들인 듯하다. 그래서 이 일화 자체가 긍정적인 뉘앙스로 소개된다. 나는 잘 모르겠다. 본인은 이쯤에서 그만둬도 행복하다고 느꼈기에 그만둔 것일 테다. 그러나 남겨진 사람들은 어떤가? 아직 그녀와 함께 만들 수 있는 추억이 더 많을 텐데 그녀가 먼저 하차해버리면 섭섭한 감정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운수가 더는 함께하지 않으면 어떻단 말인가. 누군가에게는 아무튼 함께 있는 그 자체가 행운인데.


불명예를 쓰고도 굳센 마음을 먹는다면 불명예를 씻기 위해 새롭고 험난한 여정을 떠날 수 있다. 삶의 새로운 관문이 열리는 것이다. 삶의 굴곡을 인정한다면, 삶의 저점에서 올라올 수 없다는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 골이 있으면 마루도 있다. 몽테뉴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불행이 다 죽어서라도 피하고 싶어 할 만한 불행은 아니다. 게다가 인간사에는 갑작스러운 변화가 너무도 많기 때문에 어느 지점이 우리 희망의 끝인지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면 내가 판단하지 말고 운명이 판단해서 데려가도록, 살아있는 동안에는 생명에 충실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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