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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에 관하여

「에세」 63

by 루너

바르게 살라고 귀가 닳도록 배워도 바르게 살기란 어렵다. 몽테뉴 식으로 말하면, "이성적인 사유나 교훈은 마음으로 기꺼이 다짐한들, 그것만으로 우리를 행동에까지 이끌어 갈 만큼 강력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에 순응하도록 실제 경험을 통해 영혼을 단련해서 조형해 놓지 않으면 말이다." 경험에서 배우고, 배움을 경험에 접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고대인들은 이를 위해 온갖 고행을 했지만, 우리는 몽테뉴가 했듯이 삶을 돌아보는 글을 읽고 씀으로써 충분히 수련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자. 몽테뉴는 승마 사고로 사경을 헤맨 적이 있다. 그때 몽테뉴는 의식이 없이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로 몸이 스스로 움직였다고 한다. 몽테뉴는 생사의 기로에서 오히려 지극히 기분 좋고 편안했다고 한다. 이로써 죽음에 대해 상상이 부과한 공포가 걷힌다. 이런 이야기는 죽음에 대한 현대인들의 공포를 덜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공포와 고통은 무섭지만 죽음은 무서운 일이 아니다. 이 주제는 「좋고 나쁜 것은 우리 견해에 달려 있다」에서 상세히 다룬다. 즉 몽테뉴는 평소에 다른 사람들의 삶을 연구해서 죽음이 어떤 것인지 윤곽을 잡았고,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를 증명한 셈이니, 수련의 좋은 방법은 자신을 연구하고 글을 다루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플리니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 자신을 가까이서 들여다볼 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자기 자신은 누구에게나 대단히 훌륭한 공부거리다." 몽테뉴는 이렇게 동조한다. "자기 자신을 묘사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고, 분명 그만큼 유익한 일도 없다. 사람들 앞에 나서려면 머리도 좀 더 매만져야 하고, 치장도 더하고 매무새도 더 정돈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끊임없이 나를 묘사하고 있기에 끊임없이 나를 가다듬고 있다." 자기 자신을 다루는 것을 오만이라 부르는 관습에 대해 몽테뉴는 이렇게 반박한다. "내 직업과 내 기술, 그것은 살아가는 것이다. 나의 관점, 경험, 습성에 따라 그것을 말하는 걸 금하는 사람은 건축가에게 자기가 아니라 옆 사람을 따라, 자기 지식이 아니라 타인의 지식에 의거해 건물들을 논하라고 명령해야 한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공부, 이것이야말로 만인에게 필요한 공부다. 물론 솔직한 자세로 임해야 한다. 자신을 부풀려서도 안 되고, 자신을 과소평가해서도 안 된다. 자신의 행위가 아닌 자신의 본질을 다루는 것이 진정한 자기 공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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