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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관하여

「에세」 67

by 루너

몽테뉴는 이번 글에서 자신의 독서 신조를 소개한다. 의외로 나와 같아서 공감하는 바가 많았다. 자신과 닮은 점을 찾는 일이 「에세」를 읽는 묘미가 아닌가 싶다.


몽테뉴는 자신의 한계를 안다. 몽테뉴가 에세이를 쓰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자신을 시험하기 위함이지, 누군가를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고 예사로운 내 행보를 있는 그대로, 흐트러진 모습으로 보기를 바란다. 나는 생긴 대로의 나를 드러낸다." 물론 완전하게 알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알기 위한 노력이 삶을 힘들게 한다면 몽테뉴는 과감히 버린다. "책을 통해 무슨 공부를 한다 쳐도, 거기서 구하는 것이라고는 나 자신을 알게 해 주는 지식, 내게 잘 죽고 잘 사는 방법을 가르쳐 줄 지식뿐이다." 나는 내가 읽고 있는 책은 완전히 이해하려는 목표가 있었는데, 지금은 포기했다. 지금은 몽테뉴처럼 머리가 너무 아프면 책을 대충 읽고 넘긴다. 그런 점에서 몽테뉴의 독서는 나의 독서와 닮은 것 같다.


몽테뉴가 독서에서 심오함을 덜어낸 다른 이유도 있다. 간단명료하지 않은 글은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없는 빈 껍데기인 경우가 많다. 몽테뉴는 키케로가 글을 장황하게 늘이는 것을 크게 비판하며, 몽테뉴 자신은 매우 단순하거나 매우 탁월한 역사가를 선호한다고 밝힌다. 둘 사이에 있는 사람들, 즉 우리를 위해 꼭꼭 씹어 주려 드는 사람들은 몽테뉴에게는 나쁜 작가이다. "그들은 알아 둘 만한 것들을 골라낸답시고, 우리를 더 잘 깨우쳐 줄 어떤 언행이나 사적인 행동들은 은폐한다.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은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해서, 또 어떤 것은 아마도 좋은 라틴어나 프랑스어로 쓸 수가 없어서 빼버린다." "비밀 행동은 감출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이 다 아는 일이나, 공적으로 그만큼 중대한 결과를 가져온 일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결함이다." 몽테뉴는 정보가 취사선택돼 선동에 쓰이는 일을 경계한 듯하다. 현대 정치의 여론전을 보면 굉장히 타당한 우려이다. 몽테뉴는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에게도 판단할 만한 거리는 남겨 놓아야 하고, 재료의 몸통에 속하는 것은 그 무엇도 멋대로 축약하고 추려 내어 변질시키거나 조정하는 일 없이, 그것의 전 차원을 보존하여 있는 그대로, 온전하게 우리에게 전해 줘야 한다." 나는 이 말에 크게 동의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어렵다. 한 사람이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일도 어렵고, 그것을 독자가 전부 수용하는 것도 어렵다. 그러므로 나는 한 주제에 관해 다양한 책을 읽고 다양한 견해를 접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앎 자체가 부정확하기 때문에 책을 정독하는 일 자체가 비효율적일지도 모른다. 역사 속의 한 사건을 두고도 사료들이 엇갈릴 때가 많다. 이럴 때는 어떤 자료도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렵다. 하물며 우리 자신의 일은 어떤가? 스스로를 일관된 이론으로 설명하기란 어렵다.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책을 안 읽은 사람보다 책을 한 권만 읽은 사람이 무섭다고. 정말 옳은 말이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히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책을 정독하지 않더라도 다독은 해야 한다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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