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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성에 관하여

「에세」 68

by 루너

선(善)의 극한은 어디일까? 의지에 따라 선하게 사는 일은 굉장히 훌륭하지만, 어딘가 임팩트가 부족하다. 몽테뉴가 주장하는 바로는, 악조건 속에서 선을 발휘하는 사람이 분명 더 선하다. 세네카는 "덕이란 투쟁을 통해 훌쩍 자란다."라고 했다. 메텔루스는 사투르니누스가 부당한 법을 통과시키려 하자 죽음까지 불사하며 버텼는데,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나쁜 짓을 하는 것은 너무도 쉽고 너무도 비열한 일이요, 아무 위험이 없는 곳에서 좋은 일을 하는 것은 하찮은 일이다. 하지만 위험이 있는 곳에서 옳은 일을 하는 것이야말로 덕 있는 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나는 이 견해에 찬성하지만, 강하게 찬성하지는 않는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선한 태도를 유지한다면 칭송해야 마땅하지만, 어려운 상황 속에서 굴복한 사람을 비난하는 것도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상황의 무게를 고려해야 그나마 정확한 평가가 가능하다. 특히 선을 수련한다며 고행을 하는 사람들은 기이하게 느껴질 뿐 나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한다.


아무튼 이런 얘기로 몽테뉴도 나도 글을 시작했는데, 몽테뉴가 쓴 제목은 「잔인성에 관하여」이다. 몽테뉴는 세상사에 둔감하여 본의 아니게 선한 인물로 사는 자신의 기질을 설명하다가 갑자기 이런 고백을 한다. "나는 다른 사람의 쓰라린 사정에는 매우 마음 아파한다. 어떤 경우이건 울 수만 있다면 쉽사리 함께 울어 주리라. 눈물만큼 내 눈물을 끌어내는 것은 없다." 여기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물론 살아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몽테뉴는 사람을 죽이는 일에 대해 이런 견해를 밝힌다. "법 집행에서조차 단순한 사형 이상의 것은 모두 순전히 잔인한 행위라고 본다." 그래서 몽테뉴는 사형은 인도적으로 하고, 몸의 훼손은 시체에나 하라고 주장한다.


사실 지금도 잔인한 방식의 살인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부차에서 벌어진 학살, 중동에서 벌어지는 학살 등이 그런 예시이다. 아무런 힘도 없는 사람들을 유용한 목적 없이 다치게 하고, 나아가 목숨까지 뺏는다니, 얼마나 야만스러운 일인가. 이런 면모를 아직도 달고 있는 현대를 결코 '예전보다 낫다.'라고 평할 수 없다. 차라리 '예전보다 은밀하고 뻔뻔스럽다.'라고 말하는 것이 적합하리라. 세네카는 학살을 보고 이런 말을 남겼다. "분노 때문도 아니고, 두려움 때문도 아니고, 단지 죽는 꼴을 보려고 인간이 인간을 살해하다니..." 세네카가 재림해도 비슷한 말을 남길 것 같다.


잔인성은 어쩌면 천성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라기에는, 자각이 있는 사람들도 아무렇지도 않게 자국의 편을 들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는 있어야 한다. 잔인한 세력에 가담하는 일은 정말 쉽다.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선을 지향한다면 몹시 훌륭한 일이다. 어려움 속에서 빛을 발하는 진정한 선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왜 온건한 방법을 인도적, 즉 사람(人)의 도리(道)라 부는 지 의식할 필요가 있겠다. "우리를 단지 생명과 감정이 있는 짐승들뿐 아니라 식물들과도 묶어 놓는 어떤 배려, 인류로서의 어떤 보편적 의무는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는 사람을 정의롭게 대하고, 선한 소질을 지닌 피조물에겐 선의와 온정을 베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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