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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몽 스봉을 위한 변호

「에세」 69

by 루너

이번 글은 '레몽 스봉'이라는 사람이 쓴 「자연신학」이라는 책을 변호한다. 몽테뉴가 이 책을 직접 번역했는데, 로마 교회가 이 책을 금서로 지정하자 「레몽 스봉을 위한 변호」로 대응한 것이다. 굉장히 방대한 글이다. 다루는 내용도 많고, 분량 자체도 300쪽 정도 된다. 하지만 그만큼 읽을 가치가 높은 글이었다. 특히 이 글을 통해 퓌론주의를 만나게 된 것에 정말 감사하다. 서설은 여기까지 하고 본문을 들여다보자.


「자연신학」이 왜 금서가 됐을까? 주석에 의하면 이 책은 신학과 자연과학을 별개로 구분하여, 신학의 권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탐구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것을 신학에 결부시키고, 나아가 신학을 모든 학문의 우두머리로 생각하는 교회 입장에서 탐탁지 않은 주장이었을 테다. 몽테뉴는 레몽 스봉의 책을 변호하되, 레몽 스봉의 주장을 변호하지 않는다. 몽테뉴의 입장은 이런 식이다. "어떤 식으로든 인간이 신을 다루는 시도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레몽 스봉이 무슨 말을 하든 내버려두어도 좋다."


그 근거는 이러하다. 인간은 이성을 갖춘 존재라고 하지만, 인간의 판단력에는 취약한 구석이 많다. 유혹이 명석한 판단을 방해한 예시가 많다. 어떤 일에 대한 해석은 아전인수로 이루어지지, 절대적인 진리를 단번에 찾아내는 사람도 없으며 이를 단번에 인정하는 사람도 없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종교를 주물러서 너무도 곧고 견고한 계율에서 마치 밀랍을 주물러 뽑아내듯, 서로 상반되는 너무도 많은 형상들을 끌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도 인간이 다른 생물과 비교하면 그나마 낫지 않느냐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에 몽테뉴는 동물들이 사람만큼 훌륭한 일을 해낸 사례를 수십 쪽에 걸쳐 열거한다. 사실 이 예시들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곤란하다. 놀라운 전승은 현대인의 시선으로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책에 나오지 않지만 주인을 영원히 기다리던 개 하치코 이야기, 야생으로 돌아갔어도 키워준 사람을 알아보고 반기던 사자 크리스티앙을 생각하면 아예 못 믿을 이야기는 아니다. 아무튼 결론은, 인간이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다. 이성을 인간의 전유물이라고 보기에 다른 동물들도 수준 높은 의사 결정을 한다. 높낮이가 다른 것이 아니라 법칙이 다를 뿐이다. 루크레티우스는 "모든 사물이 각각 자기 길을 가되 확고부동한 자연의 법칙이 정한 차이를 간직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인간의 행동이 유독 위대해 보이는 이유는 저지르는 사건의 규모가 크기 때문일 뿐, 본질은 같다. "우리가 이웃과 말다툼하는 것과 똑같은 이유로 왕들은 전쟁을 일으킨다. 같은 욕망이 진드기도 코끼리도 움직인다."


결정적으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이라는 물건이 그렇게도 좋은 것일까? 이전에 몽테뉴는 '퓌론의 돼지'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성이 꼭 인간을 좋은 쪽으로 인도하지는 않음을 보였다. 이성은 살아갈 힘보다 살아갈 걱정을 더 많이 주는 듯하다. 소포클레스는 "생각하지 않으면 인생이 즐겁다."라고 말한다. 돌이켜보면 나한테도 차라리 모르면 나았을 것들이 얼마나 많던가. 세상은 알면 알수록 내 자유를 구속하는 것들이 많다. 이런 상황을 바꾸지 못하고 세상에 대해 장황한 상상을 늘어놓을 뿐인 철학은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 "우리 몫으로 가진 것이라고는 바람과 연기 뿐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몽테뉴는 단순하게 생각할 것을 권한다. "단순함이 우리를 불행 없는 곳으로 이끄는 것이라면, 우리 조건으로는 최상의 행복 상태로 이끄는 것이기도 하다." 애초에 불가능한 판단에 매달리려 하지 말고, 하늘에서 제시한 계명에나 따르라는 것이다. "오직 겸손과 순복(順服)만이 훌륭한 인간을 만든다는 것이다. 의무에 대한 인식을 각자의 판단에 맡기거나 각자의 생각에 따라 선택하게 해서는 안 된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지정해 줘야 한다." 다만 이건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얘기고, 보다 일반적인 방안도 제시돼있다. 바로 퓌론주의이다.


퓌론주의는 퓌론이라는 철학자가 주창한 사상으로, 일종의 회의주의이다. 퓌론주의를 요약하는 속담은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정도일 것 같다. 비슷한 얘기로 소크라테스의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 정도가 있겠다. 탐구를 거듭하면 할수록 세상은 명확한 부분보다 명확하지 못한 부분이 더 많다. 아는 것이 늘어났다는 것은 곧 모르는 것이 더 늘어났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모르는 사람은 아는체하고 아는 사람은 지나치게 겸손해지는 현상이 이미 '더닝 크루거 효과'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자신의 판단이든 세간의 결론이든 우리는 항상 회의하며 살아야 한다. "자기를 알고, 자기를 판단하고, 자기가 무지하다고 판결할 수 있는 무지는 완전한 무지가 아니다. 완전한 무지이려면 무지 자체도 몰라야 한다. 그래서 퓌론파는 망설이고, 의심하고, 묻고, 아무것도 확신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확언하지 않는다."


퓌론주의의 궁극은 '아타락시아'이다. 아타락시아는 평정으로 번역된다. 놀람은 '알고 있던 것과 실제로 보이는 것이 다를 때' 일어난다. 퓌론주의의 절정에 이르면 아무것도 확신하지 않기 때문에 놀라는 법이 없다. 동요에서 벗어나 고요한 삶을 살기 때문에 상시 평정을 유지하는 셈이다. 논쟁에서도 퓌론주의는 굉장히 독특한 위치에 서서 유리한 입장을 얻는다. 만일 자신의 주장이 더 강하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것이고, 자신의 주장이 논박되면 자신의 의심이 더 굳어지게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퓌론주의의 금과옥조는 '에포케(Epoche)'이다. 우리 말로는 '판단 중지' 정도로 번역된다. 퓌론주의자들은 일상생활을 일반적인 방식으로 산다. 자신만의 기준을 세워서 세상에 맞서려 들지 않고, 세상이 비켜주는 대로 길을 걷는다. "그들은 어떤 판단이나 견해도 갖지 않고 그런 것들이 자기들의 일상적인 행동들을 이끌어 가도록 내버려 둔다. (중략) 그는 성찰하고 추론하고, 자연이 부여한 모든 쾌락과 편익을 즐기며, 육체와 정신의 모든 기능을 올바르고 유용하게 사용하는 살아있는 인간이고자 했다. 진리를 좌지우지하고 포고하고 수립한다는, 인간이 멋대로 스스로에게 부여한 그 망상적이고 공상적인 가짜 특권, 그것을 그는 진심으로 포기하고 버렸을 뿐이다."


나는 처음에 이런 견해가 마냥 탐탁지는 않게 느껴졌다. 자기 본위는 못 챙기고 세상에 투항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듯한 사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생각은 곧 바뀌었다. 우선 퓌론주의는 탐구를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다. "세상엔 참과 거짓이 있고, 우리에겐 그것을 탐구할 능력은 있지만 그것들을 판정할 시금석 같은 것은 없다고." 즉 퓌론주의는 편견을 버리고 생각을 열라고 가르치지, 생각을 그만두라고 말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퓌론주의를 받아들인 무신론자는 몽테뉴가 집요하게 자연의 섭리를 신에게만 부치는 것을 보고 불쾌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도 있을 수 있고, 그것이 어쩌면 옳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의 견해를 그렇다고 수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결코 완성될 수는 없지만, 결국 자신의 탐구의 귀결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퓌론주의를 받아들이면 오히려 다면적인 고찰을 발휘해서 진리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 "사유의 대상들을 다양한 각도로 다루는 것은 단일한 시각으로 다루는 것과 마찬가지로 좋고, 오히려 더 좋기까지 하다. 더 풍부하고 유용하게 다루는 것이니까."


몽테뉴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던 말은, 퓌론주의의 태도에 의지하면 어차피 신의 섭리는 신 자신만이 알 것이고 인간의 빈약한 판단력으로는 알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감각이 우리의 주인이다. 앎은 감각으로 시작되고 감각으로 끝난다." 어차피 감각의 지배를 받을 것이라면, 이성이 거짓 감각을 정당화하는 일을 놔두어 우스꽝스러운 일을 스스로 일으킬 바에 차라리 감각의 다양함을 인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감각이 미처 닿지 않는 신의 세계는 아예 판단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레몽 스봉이 무슨 말을 하든, 신부가 어떤 내용을 설교하든, 결국 고정 불변한 진리에는 접근할 수 없으니 신에 대해서는 영원히 에포케를 취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몽테뉴의 결론이다.


몽테뉴를 통해 퓌론주의를 배운 것이 정말 소중한 경험이다. 나는 은근히 내 철학을 고집해왔는데, 생각해 보면 내 철학이 나의 삶을 바꾼 일이 없는데 쓸데없는 고집을 부린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고 남들이 확신에 차서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서도 안 되겠지만. 결국 진리를 고정 불변한 것 대신에 일종의 물자체로 접근하는 것이 더 현명할 것 같다. 몽테뉴의 말에 동의한다.


다만 걱정되는 점이 있다. 결국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개념에 합의가 필요하다. 다양한 해석은 다양한 행동을 낳아 혼란을 야기한다. 몽테뉴는 그것을 신의 계율이 제한하리라 생각하지만, 신은 죽었다. 그렇다면 무수한 사상들 속에서 상대주의를 말하는 것이 과연 좋기만 한 일일까? 이는 생각해 보아야 할 대목이다. 더구나 회의주의를 적용하면 몽테뉴의 말도 완전히 믿을 것은 못 된다. 동물들의 사례를 과장스럽게 열거한 것부터 그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니 말이다. 이런 논거의 모순을 몽테뉴는 딱히 언급하지 않는다. 그 점이 아쉽다.


결국 퓌론주의는 마음의 창문을 연다는 점에서 훌륭한 사조이지만, 미세먼지가 섞인 공기가 들어올 수 있으니 마음을 주기적으로 정화할 수단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위험한 사조이기도 하다. 모든 도구가 그렇듯이, 잘 써야 좋은 법이다. 마음을 확인하고 정화할 방법으로 몽테뉴가 계속 쓰는 '시험'들이 훌륭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결국 성찰해야 잘 살 수 있지 않겠는가.


긴 글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지금까지 읽은 에세이 중 최고라고 칭하겠다. 더 놀라운 글이 나를 기다려주고 있을까? 두근대는 여정이다. 「에세」를 읽을 결심을 한 것은 내 생 최고의 선택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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