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 70
나는 「에세」 뿐만 아니라 여러 매체를 통해 죽음을 감상한다. 의연한 최후는 보는 이의 가슴을 웅장하게 만든다. 하지만 내가 그런 최후를 맞는 모습을 상상하면, 나는 피할 수 있는 죽음은 피하려 발버둥 칠 것 같다. 할 수 있는 일을 끝까지 해내고, 더 이상 할 일이 없을 때에 깔끔하게 떠나는 것이 가장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몽테뉴가 그렇게 타이르고 있는데도 죽음이 솔직히 두렵다.
내가 세상에서 매우 돋보이는 존재고, 내 죽음이 세상의 손실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생의 말미에 그런 생각에 홀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몽테뉴의 말대로, "바라보는 우리 눈이 달라진 만큼, 사물들도 달리 보이는 것이다." 최후라는 단어가 감각을 교란할 수 있음을 잘 안다. 그래서 정신이 그나마 평온한 지금, 내 본의에서 그런 생각을 할 일이 없다고 미리 밝혀둔다. 플리니우스가 재치 있게 꼬집었듯이 "하늘과 우리 사이의 우의는 우리가 죽으면 별빛이 쇠할 만큼 돈독하지 않다."
다만 의연한 죽음이 꼭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죽음을 폼 잡는 수단으로 이용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폼생폼사인 셈이다. 몽테뉴는 이렇게 해설한다. "위험한 지경인데도 아직 사태를 확실히 인식하지 못한 자를 두고 결단성 있고 의연하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죽는 것을 내 눈으로 본 사람들로 말하자면, 그들이 죽어 갈 때의 태도를 결정한 것은 그들의 의사가 아니라 운수였다." 결국 상황에 달린 것이다. 사람을 평가하기란 이렇게 어렵다.
삶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여기는 태도를 보이다 자의로 죽음을 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산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닐세. 자네 하인들도, 짐승들도 살고 있네. 하지만 명예롭고 현명하고 의연하게 죽는 것, 그것은 대단한 일이지. 생각해 보게, 자네가 얼마나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지. 먹고, 마시고, 자고, 마시고, 자고, 또 먹고 말일세. 우리는 끊임없이 이 쳇바퀴 속을 돌고 있네. 견딜 수 없는 나쁜 일들뿐 아니라 삶의 포만 그 자체가 죽고 싶어지게 하네." 멋진 말이지만 나는 좋게 보지 않는다. 삶의 포만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피나는 노력이나 든든한 혈통이 전제돼야 한다. 죽는 모습은 말미의 말미일 뿐이다. 명예와 현명함과 의연함은 나머지 부분, 아마도 인생의 99.9%는 넉넉히 차지할 '삶의 모든 과정'을 통해 보여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