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 73
영광은 오직 결과에만 존재해야지 목적에 존재하면 안 될 것이다. 마음속에서 우러난 선의지에 의거한 선행은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영광을 염두에 두고 하는 선행은 진정성이 떨어진다.
엄격한 잣대이다. 실제로 몽테뉴는 이 잣대를 키케로에게 갖다 대서 몽테뉴 본인이 인용하는 수많은 어록을 스스로 퇴색시킨다. 또 영광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 과연 정말로 존재하기나 할까? 아리스토텔레스마저 영광을 외적인 보물 중 제1열의 자리에 올렸다고 하는데.
다만 영광이 우리의 본질을 흐리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덕의 가치를 영광에 두면 덕은 매우 헛되고 하찮은 것이 된다. 그러면 덕에 별도의 지위를 부여하고 운수와 분리하려 해 봤자 헛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세간의 평판보다 더 우연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 행동이 알려지고 눈에 띄게 되는 것은 순전히 운에 달렸다." 예를 들어 나는 중학교 시절 학급의 어떤 아이들보다 심성이 착하고 선행을 아끼지 않는 친구를 본 일이 없는데, 그 친구는 선행상 후보에 거론되는 일조차 없었다. 평소의 행적이 눈에 띄게 할 존재감이 없던 것이다. 선행이 가져다주는 영광을 누리려면 일단 인기가 있어야 한다는 방증이었다.
그러므로 올바른 태도는 이런 것이다. "진정으로 위대하고 현명한 영혼은, 우리의 본성이 그 무엇보다 추구하는 목표인 명예를 행위 그 자체에 두지 영광에 두지 않는다." 물론 이 말 또한 명예욕이 있던 키케로가 한 말이지만. 목격자가 있어야만 선한 사람이 존재한다고 말하면 이치에 맞지 않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이 실재한다면 그는 위선자이고, 곧 선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남들이 알아보지 않는 자리에서 묵묵히 선행으로 세상을 빛내는 사람이야말로 칭송받아 마땅하다. 이 경우 그를 알아봐 주지 못하는 세상이 그에게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명예가 아니라 양심이 나의 주인이어야 한다. "모든 명예로운 인간은 자기 양심을 잃느니 차라리 명예를 잃는 편을 택한다." 나부터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선한 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힘쓰자. 그리고 그런 사람이 보인다면, 나라도 그 사람을 알아볼 수 있도록 힘쓰자. 이것이 이번 글을 읽고 얻은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