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 80
이 글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자연의 작품들을 지배하는 보편적인 질서에는 놀라운 상호 유관성과 유사성이 있어, 그 질서가 우연의 소산도 아니요, 여러 다양한 주인들의 지배를 받는 것도 아님을 잘 보여 준다. 우리 신체의 병증과 상태는 국가와 정부에서도 볼 수 있다. 왕국들, 공화국들도 우리처럼 태어나고, 번성하고, 늙어서 시든다. 우리는 체액의 과잉에 처하기 쉬운데, 그것은 무용하고 해롭기까지 하다. 좋은 체액이든 나쁜 체액이든 과다하면 질병의 통상적인 원인이 된다." 즉 국가가 돌아가는 원리와 사람 개인의 몸이 돌아가는 원리는 같은데, 조화에서 벗어나 어떤 성향이 지나치게 강해지면 국가에도 개인에도 해롭다는 것이다. 나는 이 성찰이 재밌다. 국가를 개인의 확장이라고 보는 관점은 마치 국가에 개별적인 영혼을 부여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반대로 국가가 개인에게 영향을 주어 개조하는 경우도 있음을 간과한 성찰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참신한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몽테뉴는 이 성찰을 바탕으로 국가가 젊은이들의 끓어넘치는 혈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젊은이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방식을 사용한다고 주장한다. 흥분된 감정을 이웃 나라와의 전쟁으로 방향을 틀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는 제목 그대로 좋은 목적을 위해 나쁜 수단을 쓰는 셈이다. 몽테뉴는 마찬가지로 로마인들은 죽음을 경시하는 풍조를 기르기 위해 실제로 사람들이 가볍게 죽는 검투사 무대를 꾸몄다고 주장한다.
이런 사례를 읽고 나니 몽테뉴의 성찰이 재밌기는 하지만 전체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삶을 가벼이 여기는 근거를 제공할까 봐 무서워졌다. 전쟁만큼 헛된 일도 없다. 사람이 개인의 행복이 아니라 평생 볼 일도 없는 높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국가와 개인에서 비슷한 점을 찾으면 재밌는 점들을 발견할 수 있지만, 빈약한 논리로 둘을 동일시한다면 이렇게 헛된 희생까지도 당연한 것이 되고 만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 돌아가서, 좋은 목적을 위해 나쁜 수단을 쓰는 그 자체가 정당한 일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요즘 읽고 있는 플라톤의 말을 빌면, "훌륭함은 앎이다." 좋은 목적을 위해 나쁜 수단을 쓰면 일 전체가 훌륭하다고 보기 어렵다. 나쁜 수단을 쓴다는 것은 더 좋은 수단이 있는데도 미처 알지 못하고 행하는 경우이거나, 아니면 목적에 눈이 멀어 자신이 쓰는 수단이 나쁘다는 것도 미처 생각지 못하는 경우라고 생각한다. 나라면, 나쁜 수단이 좋은 목적의 본질을 흐리기 때문에, 차라리 그 좋은 목적을 포기할 것 같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 좋은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