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당신 누구요?

by 러너인

"각자 자기소개부터 할까요? 숫자를 쓰지 말고 소개해주세요." 백일백장 첫 만남에서 진화작가님의 한 마디에 머릿속엔 숫자가 맴돌았다.

"00세, 직장 00년 차, 러닝 0년 차, 00km 울트라마라톤을 완주했고, 00년 0월에 책을 냈고, 딸이 0명 있고 SNS는 0년 했고 글 쓴 지 0년..."
'숫자는 금지'라는 말에 망치로 한 대 맞은 듯했다.

문득 법륜스님 즉문즉설이 떠올랐다.
"어떻게 해야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자기가 누군데?"
"00살 여자고요."
"나이를 묻지 않았어요. 당신 누구요?"
"저는 그냥 저인 것 같아요."
"느낌을 물어본 게 아니에요.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사랑합니까? 사랑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자기를 괴롭히지만 마세요."

숫자도 준비도 없이 시작한 내 자기소개는 이랬다.

"살다가 집과 직장 모두 숨 막히던 시절이 있었어요. 살려고 달리기를 시작했어요. 운동이라곤 해본 적 없는 문과 체질인데, 뛰면서 잊었던 글쓰기 감각이 되살아났어요. 인스타에서 러너들과 글로 소통하다가 책까지 냈고, 북토크가 부러워 ‘셀프 북토크’를 매일 sns에 올리기도 했어요. 이제는 타이틀보다 쓰는 삶이 더 중요해요. 출간 후 찾아온 공허함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이번 100일 글쓰기에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자기소개를 하며 눈물을 보이시는 작가님도 많았다. 사실 듣다가 나도 눈시울이 붉어지곤 했다. 숫자를 쓰는 자기소개였다면, 진짜 자기 이야기를 꺼내진 못했을 것 같다. 숫자를 쓰지 않으니 화려함 대신 진짜 이야기가 나왔다. 인스타 속 웃는 얼굴이 아닌, 일기장 속 나를 꺼내놓는 순간이었다.

자기소개만으로 가슴이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바로 이어진 작가님들의 낭독, 서로를 향한 응원과 솔직한 조언들은 상상만큼 좋았다. 사실 무대 앞으로 나가 자기 글을 낭독할 때 정말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나도 대부분의 작가님들과 다르지 않았다.

"삶을 사랑하고 나로 살기 위해 달린다... 한라산을 뛰어서 오르고 사람들과 함께 버티며... 13시간 동안 100km 울트라 마라톤을 끝내 완주해 낸 이야기에..."

이 대목을 읽다가 목이 메어서 한 손으로 가슴을 누르고 중간중간 호흡을 가다듬고 가까스로 낭독을 마쳤다.

"당신 누구요? 왜 당신은 글을 쓰시오? 숫자 떼고 관계를 벗은 당신은 대체 누구요?" 스님의 매서운 질문을 떠올린다.
"당신 누구요? 누군지도 모르는데 무슨 글을 쓴다는 말이요."

집으로 돌아오며 질문 하나를 품었다.
"그래 거기 당신, 숫자 뒤에 숨어 있는 진짜 당신은 누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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