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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미화하는 중입니다.

by 러너인

"형님은 목표가 뭐예요?" 함께 뛰는 동생이 묻는다. 그는 설명을 덧붙인다. "처음에 형님이 책을 내신다고 했을 때, 저는 형님이 책을 쓰시는 게 목표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책을 내시고 계속 뭔가 하시는 게 신기해서요."

지금 목표가 뭘까 생각에 잠겼다가 빙긋 웃으며 답했다. "난 내 안의 모든 가능성을 꺼내는 중이야." 보충설명이 필요했다. "처음엔 책을 내겠다는 작은 목표에서 시작했어. 평생 고기를 못 먹어본 사람이 고기만 꿈꾸는 것처럼 처음엔 책을 내는 것만 생각했는데, 책을 내니까 계속 새로운 꿈이 생기더라구. 이젠 나도 내가 어디까지 갈 지는 몰라. 계속 달릴 뿐이니까."

집에 돌아오면서 올리버 웬들 홈스의 말을 떠올렸다.

"새로운 경험으로 사고가 한번 확장되면 결코 그 전의 차원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달리기를 만나고 경험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차원을 맛보니 다시는 그전의 무기력한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글쓰기도 그렇다. 글쓰기가 만들어내는 놀라운 차원을 맛보니 다시는 그전의 나약한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글쓰기는 경험을 재해석하는 놀라운 힘이 있다. 러너들은 아주 힘든 대회를 뛰고 와서 사진을 올리고 후기를 쓴다. 필력에 따라 그럴듯한 글이 되기도 하고 그저 사진과 영상이 글이 되기도 하지만 핵심은 '미화'다.

누군가 자신의 힘들었던 대회 후기를 올리면 댓글이 올라온다. "앗. 벌써 미화가 시작되었네요." 글쓴이는 멋쩍게 웃으며 답을 단다. "그래도 즐거운 경험이었어요. 뛸 때는 다시는 안 간다고 했는데 내년에 또 대회장 출발선에 서있을 것 같아요."

누구나 자신만의 고통을 안고 산다. 모든 순간이 행복할 수 없다. 누군가는 약물에 의지하거나 자기 연민이나 비난으로 영혼을 상하게 하지만, 누군가는 달리고 쓰면서 자신의 삶을 재해석하기 시작한다. 일종의 '미화'다. 하지만 삶을 다시 살아내게 하고 가슴을 뛰게 하는 건강한 미화이다.

삶도 그렇지 않을까. 한 사람의 인생이 거대한 울트라 마라톤 대회라면, 지금 나는 어느 지점을 달리고 있을까. 당신은 지금 어느 언덕을 뛰고 있을까?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다리가 질질 끌리는 순간들. 우리는 지금 진정 어디쯤 가고 있을까...


동료 러너의 파이팅에 잠시 웃음이 났다가 또 혼자만의 레이스에 빠지는 당신. 중간에 숨은 그림 찾기처럼 길목에서 당신의 그 순간을 생생하게 담는 포토작가. 그를 보자마자 마치 하나도 안 힘들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는 나, 그리고 당신.

인생이란 레이스를 통과하며 애쓴 자신을 꽉 안아주며 '앞으로 다시는 사람으로 태어나지 말아야지.' 하며 투덜대다가 이 생에서의 여행을 끝내고 돌아가서 이런 후기를 쓰고 있을 우리를 떠올린다.

"그래도 너무 즐거웠어요. 또 신청하려고요. 지구별에서의 여행 같은 삶. 다시 한번요."


환한 빛 속에서 함께 애쓰며 달린 이름 모를 누군가 이런 댓글을 달지 않을까?

"벌써 미화가 되었네요. 지구별의 삶. 그땐 너무 힘들어서 죽겠다고 하셨잖아요?"

고통을 기쁘게 다시 쓸 수 있는 능력. 이것이 달리기, 글쓰기, 책 쓰기, 모든 도전이 주는 힘이 아닐까. 나는 달리기와 글쓰기가 삶을 미화하는 기술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계속 미화하다 보면 정말 그렇게 아름다워진다고 믿는다.

"형님은 목표가 뭐예요?"
"내 안의 숨은 가능성으로 나와 세상을 미화시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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