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달리기에는 이야기가 있다

새로운 출사표를 준비하며

by 러너인

회사일로 야근을 고민하다 눈을 질끈 감고 가방을 쌌다. 2025년의 마지막 러닝훈련이 있는 날이다.

언덕을 뛰기로 되어있는 날. 그냥 야근을 할까 생각이 올라온다. 내일까지 무조건 끝내야 하는 일. 업무에 쫓길 땐 새로운 도전이 망설여진다. 가슴이 작아지고 괜히 힘들 게 안 뛰어서 좋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나약해지는 마음.

하지만 가기로 했다. 유종의 미. 왠지 오늘 안 가면 2025년 땀 흘린 모든 시간이 사라질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훈련을 하자. 가서 언덕을 뛰자. 올 한 해 함께 땀 흘린 사람들과 마지막으로 훈련하고 인사 나누자. 버스를 기다리는데 대학동기에게 전화가 왔다.

"승우야. 한국어교육과정 등록했니?"
"아니, 나 좀 고민 중이야. 바뀐 일도 정신없고 해서."
"어? 난 네가 그날 모임 때 바로 등록한다고 해서 너 믿고 지금 신청하고 있는데. 같이 하자. 안 해야 할 이유는 넘치지만."
"... 알겠어. 나도 다시 고민해 볼게."

전화를 끊고 훈련장으로 향하는 내내 마음에 새로운 도전을 할지, 회사일로만 시간을 채울지 갈등이 생겼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까 6시에 훈련장으로 나오면서 했던 생각. '훈련에 가자. 무조건 뛰자. 뛰고 나서 집에 와서 새벽까지 일하더라도. 회사일만큼 나를 사랑하는 일도 중요하니까.'

훈련장에 가는 것과 야근하는 것, 직장에 다니며 사이버대학 한국어교육과에 편입하는 것과 주어진 일만 하는 것, 어느 것이 더 힘든 선택일까. 어느 것이 더 나은 것일까. 2024년 종합감사, 전세 구하기, 첫째의 고3 수험생활. 24년 1월 출사표에 출간작가가 되겠다고 선언했을 때도 아무것도 없었다. 책의 원고를 다 쓴 것도 아니었고 어느 출판사에서 연락을 준 것도 없었다. 오히려 망설이다가 용기 내서 보낸 DM하나. '무조건 작가 되기' 팀에 합류하면서 출간의 꿈이 현실로 향하는 첫걸음이 되었다.

달리면서 생각하기로 했다. 버스를 세 번 타고 훈련장소에 도착했다. 야근 대신 훈련을 선택하고, 잠을 줄여서 일은 마치기로 마음먹으니 홀가분했다. 핑계 없는 삶을 위해 운동화를 신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 훈련 코스는 짜릿했다. 언덕 세 군데를 포인트 구간으로 하는 업힐 코스. 페이스조를 6:00 페이스조로 낮췄다.

첫 번째 포인트 구간을 5:00으로 갔다가 두 번째는 4:20 정도 페이스로 올렸다. 뒤에서 너무 빠른 것 같다고 해서 앞으론 언덕 포인트도 5:00 정도로 맞추려고 늦췄더니 뒤에서 다들 질주하듯 달려 나와서 앞질러 간다. '헉, 이 분들이. 오늘 정말 날 잡으셨나. 힘드실까 봐 페이스 조절하려고 했는데... 그렇다면 나도 오늘은 뜨겁게 달린다!'

가장 가파른 급경사 언덕이 포인트 3 지점이다. 앞의 두 분이 미친 듯이 달려 나간다. 나도 최선을 다한다. 어느 때는 3:00 페이스로 전력질주를 했다. 질주의 질주. 누구 하나 자신과 타협하는 사람이 없다. 여기가 6:00조가 맞나 실소가 나온다. 끝까지 야무지게 언덕을 달리고 70분 언덕훈련을 마쳤다. 11km를 넘게 달렸다.


자리에 앉아서 훈련장에 갈까 일을 마치고 갈까 고민하던 나약한 나는 더 이상 없다. 저 높이 솟은 언덕을 향해 전력질주하는 러너만 있을 뿐이다. 수많은 전사들 틈에 서서 함께 뛰다 보니 나도 나약한 직장인이 아닌 강인한 러너로 서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껍데기가 아닌 그 내면의 의식을 사랑한다는 말이다. 달리기를 사랑한다는 건 페이스가 아닌 그 내면의 용기를 사랑한다는 말이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쓰는 삶에는 두려움이 있다. 뜨겁게 움직이고 언덕을 내달리며 쓰는 삶에는 두려움이 없다.

언덕을 뛰면서 다시금 깨달았다. 나는 도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글로, 삶으로, 행동으로 사는 러너인이라는 걸. 새로운 도전 목록을 꺼내야겠다. 출사표를 새로 써야겠다. 모든 달리기에는 이야기가 있으니까. 새로운 이야기를 써야겠다.

작가의 이전글우리의 달리기는 때론 우리의 자서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