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km를 달리지 않는 법

by 러너인

오늘 목표는 30km가 아니다. 이 기둥을 제시간에 통과하는 것이다.

트랙 75바퀴, 30km 장거리 훈련 날이다. 코치님의 말을 경청한다. “같은 속도로 달리는 감각을 익히고, 버티는 힘과 자제력을 기르는 날입니다. 조별로 2km씩 번갈아 앞에서 끌고, 뒤에서도 따라가는 연습을 하세요.” 오늘 우리 조 목표 페이스는 km당 5분 20초. 힘든 속도는 아니다. 계산은 단순하다. 400m 트랙 한 바퀴를 2분 8초로 달리고 75번 반복하면 끝이다.

컴퓨터 과학에는 분할정복(Divide and Conquer)이라는 분할-정복-결합의 3단계 문제 해결 방식이 있다. 큰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하려 들지 않고 더 작은 문제로 나눈 뒤, 그 작은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해 결국 전체 해답에 도달하는 방식이다. 30km 장거리를 뛰려고 한다면 달리기 자체의 힘듦보다 30km(75바퀴)라는 숫자에 부담감이 생긴다. 장거리 러닝에도 분할정복이 필요하다.

1단계는 ‘분할’이다. 30km를 ‘작은 문제’로 쪼갠다. 30km(트랙 75바퀴)를 400m(트랙 1바퀴)로 나누고, 그 400m마저 트랙 중간 두 개의 기둥을 체크포인트로 잘게 쪼갠다. 이제 목표는 더 이상 30km가 아니라 지금 눈앞의 저 기둥을 제시간에 통과하는 것뿐이다. 더 이상 30km는 ‘큰 문제’가 아니라 ‘해결 가능한 아주 작은 문제’가 된다.

2단계는 ‘정복’이다. 400m 한 바퀴에 2분 8초, 200m마다 1분 4초지만 트랙을 달려보니 네트가 시작되고 끝나는 기둥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훨씬 직관적이다. 첫 번째 기둥을 1분 9초, 두 번째 기둥을 1분 37초 정도로 통과한 후 남은 직선 구간을 같은 속도로 달리면 2분 8초에 도착한다. 맞지 않는 평균 페이스만 보다가 400m를 다 달린 후에야 제 속도로 달렸는지 알게 되는 게 아닌 2번의 조정 기회가 있다. 1번 기둥 통과시간으로 1차 조정 후 2번 기둥 통과시간으로 2차 조정하면 400m를 목표시간에 근접하게 맞출 수 있다. 분할정복의 ‘정복’ 단계다.
작은 문제를 정확하게 체크하고 반복적으로 정복하며 확실하게 문제를 풀어나간다.

3단계는 결합이다. 달성해야 할 목표나 누적거리 대신 지금까지 반복적으로 해결한 2분 8초가
하나, 둘, 셋… 정답처럼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부터 ‘지금 몇 km를 뛰고 있지? 지금 얼마나 남았지?’라는 생각이 사라진다. 그 대신 ‘이번 랩은 시간을 잘 맞췄나?’하는 생각만 남는다. 느렸으면 조금 빠르게, 빨랐으면 조금 느리게. 200m만 생각하고 기둥을 지날 때 속도를 점검하고 남은 거리에서 넘침과 모자람을 채워나간다. 작은 정답들이 모두 모이자 결국 30km라는 목표가 어느새 다가온다. 결과는 동일하지만 부담은 없다.

우리는 종종 큰 목표를 세우고 압도된다. 달리면서 남아있는 거리를 떠올리다가 몸보다 마음이 먼저 꺾이기도 한다. 거리, 기록, 남은 시간 같은 것들. 거대한 산처럼 서있는 목표를 떠올리며 지레 겁먹고 지금 이 고통이 영원할 거라 착각하고 걸음을 멈추기도 한다. 오늘 배운 것은 단순하다. 큰 목표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말 것. 지금 즉시 해결할 수 있는 최소 단위로 목표를 쪼갤 것. 그 작은 문제를 확실하게 정복해 나갈 것. 정신을 작은 문제 해결에만 쏟고 반복할 것. 그것이 모이면 목표는 저절로 달성되는 것.

남들은 다 아는 이론을 이제야 몸으로 이해한 게으른 인문계 러너인의 장거리 분할정복 체험기.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지만, 러너에게는 이렇게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100km도 결국은 한 랩부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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