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달리기에는 이야기가 있다
5년 3개월 24일. 내가 처음 10km 완주한 지 1,942일. 어제 둘째 딸이 첫 10km를 완주했다. 어제 바나나런클럽 훈련 후 가족 단톡방에 익숙한 런데이 기록이 올려져 있었다. 1시간 4분 33초, 6:26 페이스. 평지가 아닌 오르막이 있는 광교호수공원을 뛴 기록. 말없이 올린 한 장의 사진, 얼마나 기쁘고 벅찼을까.
10km 완주는 특별하다.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거리. 10km를 달릴 체력이 생기면 대회에 나갈 수도 있고 더 긴 거리를 도전하거나 기록을 당기기 위한 훈련이 가능하다. 그 모든 시작이 10km 완주에서 시작된다. 딸이 가끔 뛰는 건 알았지만 공부하느라 거의 못 뛰었는데 언제 이렇게 러너가 되었을까.
5년 전 처음 10km를 완주하고 벅차올랐던 나의 그때를 떠올랐다. 응원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외롭지 않았다.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그 뿌듯한 성취와 해냈다는 자존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아이에게 물었다. “그 원천호수 가파른 언덕은 어떻게 달렸어?” 아이가 웃으며 말했다. “아니, 처음엔 5km만 뛰려고 했는데 조금 더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달리다 보니 그 언덕이 나오는데 그냥 피하지 않고 달렸어. 진짜 죽을 것 같이 힘들더라. (웃음) 5km 지나서 잠깐 걷다가 다시 힘내서 5km를 더 달렸어. 거리가 좀 애매해서 10km 맞추기가 쉽지 않더라.” 가슴에서 뜨거운 뭔가가 올라왔다. “와, 넌 진짜 러너다. 대단해. 최고다. 수고했어. 애썼어.” 아이를 품에 꼭 안아주었다.
그 벅찬 얼굴과 목소리에 모든 것이 묻어나있었다. 누구의 인정도 필요 없는 순간, 아이는 그 순간을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네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구간을 달릴 때 아빠도 트랙에서 사람들과 런클럽에서 3km, 2km, 1km를 페이스를 올리며 달리고 있었단다.’ 나도 훈련이 끝나고 나름의 성취감과 기쁨에 행복해하고 있었다. 그 순간 아이도 그 벅찬 마음을 담은 인증사진을 내게 전했다. 나는 안다. 어떤 순간은 혼자서 오롯이 그 순간을 누려야 함을. 10km를 완주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아이가 얼마나 벅찼을지. 붉게 달아오른 얼굴, 땀으로 젖은 헤드밴드, 젖은 옷, 절로 나오는 웃음, 깃털처럼 가벼웠을 발걸음, 러너인 아빠에게 말해줘야겠다는 그 마음까지.
나의 첫 10km를 다시 만나고 싶어졌다. 강연자료를 펼친다. 2020년 11월 2일. 어제 딸보다 더 느린 속도로 첫 10km를 뛰었다. 그날의 기록을 영혼에 새겼다. 그날 달리며 느꼈던 시원한 바람과 이 악물고 넘었던 언덕, 5km를 넘고 10km에 다가가던 그 순간의 긴장감,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 하던 의심이 내가 해낼 수 있다는 확신으로 바뀌던 순간. 내 몸과 마음에 스위치가 켜진 그 순간. 아이도 어제 내가 처음 그 도전을 했던 바로 그곳에서 똑같이 달리며 자신의 한계를 넘었다.
주말에 딸들과 갔던 5km 수원 국제하프마라톤 대회는 나와 둘째에겐 충분하진 않았다. 평소에도 5km 이상 쉼 없이 달릴 수 있는 둘째 딸에게도 그 거리는 도전이 아닌 언니와 추억을 쌓기 위한 시간이었다. 의미는 있었다. 아이가 나간 첫 마라톤 대회였고, 우리 셋이 함께 달린 첫 대회였다. 끝나고 뜯었던 닭튀김도 좋았고 하나를 사서 나눠서 먹은 두쫀쿠도 행복했다. 아이의 방에 가보니 그날의 5km 완주메달이 걸려있었다. 어제의 10km 도전도 그날의 첫 대회에서 이어졌을지 모른다. 대회장의 뜨거움, 완주의 기쁨. 둘째와는 10km 대회를 아니 그 이상도 함께 달릴 수 있을 거라는 행복한 상상을 해본다.
달리기를 하며 맛본 행복한 순간들. 사람들과 처음 같이 뛰는 즐거움을 배운 날. 첫 5km, 첫 10km, 첫 21km, 첫 42km, 첫 100km, 훈련이 성공한 날. 훈련이 실패한 날. 대회에 나가서 생긴 에피소드, 그리고 나의 첫 달리기 책, 첫 오디오북, 첫 강연, 도서관, 기업체, 공무원, 아이들과의 첫 새벽런, 달리기를 배우기로 한 날, 소중한 바나나런클럽 코치님, 매니저님, 그리고 러너분들. 첫 인스타그램, 그 수많은 처음 속에서 조금씩 성장하고 세상을 향해 달릴 수 있었다. 딸의 첫 10km가 완주가 주는 기쁨은 그 모든 것보다 더 작지 않다. 나의 달리기가 내가 없는 시간에도 유산처럼 딸의 두 발에 새겨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귀한 일이 있을까.
나는 아빠가 아닌 러너로서 딸을 안아주었다.
어제 나는 딸을 러너로 다시 만났다.
응원한다. 러너로서.
사랑한다. 아빠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