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고 싶지 않은 것에 이유가 있어?

모든 달리기에는 이야기가 있다

by 러너인

4년 전,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알게 된 인친이 있다.

바다 건너, 달리기에 진심이었던 한 일본 러너.

만난 적 없는 우리는 기록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서로를 응원했다.


나는 그녀의 근성이 좋았다.

보통 달린 뒤 km당 페이스 차트를 SNS에 올리지만, 그녀는 달랐다. 그날 달린 구간 중 가장 빨리 달린 구간을 빨강 동그라미로 표시하고 그날의 자신을 칭찬했다.


그녀의 붉은 동그라미는 내게 동기부여가 되었다. 언제부턴가 나도 동그라미를 그렸다. 보통은 마지막 1km가 그랬다. 항상 마지막은 전력을 다해 마무리했으니까.


그녀가 최고기록(pb)을 세우고 자랑스럽게 피드에 올린 날이면, 번역기를 돌려가며 정성껏 댓글을 달았다. 일본어를 못해서 시간은 걸렸지만, 모든 러너의 마음은 하나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4년이 지났다. 그녀는 기록을 새로 쓰고 난 책을 썼다.

문득 소식이 궁금해서 모처럼 피드를 찾아갔다. 캡처한 그녀의 글을 번역기에 넣는 순간, 눈이 멈췄다.


“지고 싶지 않은 것에 이유가 있어?”로 시작하는 그녀의 글.


“어른의 마라톤은 이기거나 지는 건 아니지만 학창 시절이 생각나. 고등학생땐 모르는 여자들에게 지고 싶진 않았어. 그런 생각은 아직까지도 조금 남아있어.”


“모르는 여자에게 지고 싶진 않아.”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썼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남자니까 “모르는 남자에게 지고 싶진 않아.”랄까?


4년 전 더 초보였을 때, 작은 마음으로 뛰었다.

누군가 나를 앞질러가면 지고 싶지 않아서 그를 제치려 애썼다.


오늘은 조금 늦게 밖으로 나왔다. 달리기 좋은 날씨였다. 가볍게 달릴 생각으로 출발했다. 원천호수를 달렸다. 6분 페이스로 시작해서 조금 빨라졌다. 8km 정도 달리다가 이제 그만 뛰고 커피나 마실까? 하다가 한 대 맞은 듯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지고 싶지 않은 것에 이유가 있어?”

그 문장을 떠올린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지고 싶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단 한 명에게만큼은, 정말 지고 싶지 않았다.

바로 ‘익숙한 나’에겐.


대충 달리고 끝내려던 마음이 사라졌다.

10km를 끝까지 채우기로 했다.

마지막 1km가 남았을 때,

사연이 있는 사람처럼 이를 악물고 뛰기 시작했다.

“익숙한 나에게는 지고 싶지 않아.”

“익숙한 나에게는 지고 싶지 않아!”

“익숙한 나에게는 지고 싶지 않아!!!”

입으로 중얼거리며 뛰었다.

페이스는 4분대로 접어들고

마지막엔 3분 41초 페이스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해냈다!”


나는 ‘익숙한 나’에겐 지고 싶지 않다.

‘너 따윈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익숙한 목소리들.

달리기란 ‘익숙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기술’이 아닐까.


쉽게 포기하고 자신을 쉽게 여기고

안주하려는 ‘익숙한 나’를 이기는 기술.


내 책 <모든 달리기에는 이야기가 있다>를 검색한다.

제목 옆에 낯선 ‘베스트셀러’가 쓰여있다.

예약판매 6일 차. 예스 24 38위, 교보 85위.


많은 분들이 나오지도 않는 책을 응원해주시고 계신다. 가슴이 뜨겁다.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아도 될까? 하루하루 실시간으로 감동받는다.


아직도 가끔 내 안의 익숙한 나를 본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익숙한 나에게 지고 싶지 않다." 모르는 여자들에게 지고 싶지 않아서 이를 악물고 뛰는 그녀처럼.


지고 싶지 않은 이유는 결국,

내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는,

나를 사랑하는 데 익숙한 내가 되고 싶다.

그 누구보다 나에게,

가장 따뜻한 러너가 되고 싶다.


P.S. 고맙습니다.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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