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04) 현피를 떠도 꿀릴 게 없다

by 러너인

현피는 보통 이렇게 정의한다. 현실+PK(Player Kill) 혹은 현실 PvP의 줄임말. 일본식으로 하면 실제로 만나서 싸우는 일종의 일대일 결투 일기토와도 유사하다.

이슬아 작가님 피드에 사인회 소식과 현피 티셔츠 판매소식을 접했다. 검은 반팔티 앞에 크게 한글로 이렇게 쓰여있다. "현피를 떠도 꿀릴 게 없다" 한참을 웃었다. 진짜 가서 살까? 책 들고 가서 싸인도 받고? 이 얼마나 발칙한 자신감과 패기냔 말이다.


겸손이 미덕인 동방예의지국에서 이런 발칙한 문구라니 유쾌하다. 살면서 이런 자세로 24시간 살아간다면 얼마나 많은 경험과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을까?


내향인, 소문자 i 대문자 I, 내성적, 수줍어서, 부끄러운, 자신감이 없는... 이런 단어로 사춘기와 주어진 인생을 채우며 살아왔지만, 생각해 보니 너무 아깝고 아쉽다. 40대 후반에 와서야 봉인이 풀린 듯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이 두렵지 않다.


내 인생 최초의 현피는 초딩 때다. 반에서 키가 큰 누군가와 말싸움을 하다 목소리가 커졌다. 객기로 불쑥 이런 말이 나왔다. "야, 너 남아!" 그 친구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진짜? 그래 한 번 해보자. 너 남아." 주위 아이들이 "와, 얘네 오늘 싸운대." 수업이 마칠 때가 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쩌지, 못 이길 텐데...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자책하는데 수업이 끝났다. 그에게 끌려가듯 공터로 향했다. 우리를 둘러싸고 신이 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간다. 공터에 마주 보고 섰다. 월등한 신체조건인 그는 자신감이 넘친다. 주위를 둘러본다.


여기는 콜로세움이다. 내 앞엔 며칠 굶은 사자 한 마리가 버티고 서있고, 나는 맨손으로 그 앞에 서있다. 주위는 곧 피 튀기는 장면을 상상하며 소리를 지르는 관중들의 환호성이 들린다.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온다. 울음이 터졌다.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있는 나를 보니 내가 봐도 한심하다. 내 앞의 사자가 황당한 얼굴로 나를 보다가 '싸우지도 못할 거면서 왜 남으라고... 그냥 빨리 집에 가라.'하고 등을 돌린다. 우릴 둘러싸고 있던 아이들의 푸념이 들린다. 아이씨, 재미없게...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오며 어린아이가 평생 느낄 수 있는 수치심과 자괴감을 그날 다 느꼈다.


비록 어린 날 현피는 웃픈 자책골로 끝났지만, 남은 인생에서 마주할 수많은 현피가 남아있다. 키보드에서만 강한 내가 아닌 누군가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눌 때, 많은 사람들과 만날 때, 평소 우러러보던 누군가와 처음 만날 때, 똑똑한 누군가와 만날 때, 돈 많고 예쁘고 잘난 사람과 만날 때, 팔로워가 엄청 많은 사람, 연예인과 만날 때 등


상상 속 누군가를 현실에서 만나는 게 현피라면, 내가 평소 꿈꾸던 내 모습을 만나는 장면도 현피가 아닐까? 출간작가를 꿈꾼다면 북토크를 하고 있는 자신을 만나는 순간, 어떤 꿈을 이룬 자신의 모습과 만나는 순간 말이다.


내가? 나 같은 게 그렇게 될까? 풀코스가 두려운 러너라면 내가 완주할 수 있을까? 어쩌면 가장 두려운 상대는 공터에서 마주한 등치 좋은 누군가가 아닌 성공한, 꿈을 이룬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 그리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


'현피를 떠도 꿀릴 게 없다'는 마음만 있다면, 뭐가 두려울까.


나이 먹고 그것을 깨달은 건 나 혼자 호수공원에서 겨울에 첫 42km 풀코스를 완주했을 때였다. 세상에 두려울 게 없었다. 나 풀코스 뛴 사람이야. 너희가 풀코스의 맛을 알아? 근거 없는 자신감과 우쭐대는 마음. 지금까지 자신을 작게 만든 작고 큰 문제들을 작게 접어서 바닥에 세워놓고 뻥차버리는 마음.


SNS를 시작한 지 5년이 지났다. 인스타그램이 메인무대다. 인별은 사진이나 영상만 올리는 곳이라고?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 하나만 묻고 싶다. 인스타그램 게시물 글자 수 제한이 몇 글자인지 아냐고.


2,200자다. 5년 간 어떤 주제로 피드를 꽉 채워서 쓴다면 어떨까? 현피를 떠도 꿀릴 게 없다. 난 그렇게 피드 글자 수 제한까지 꽉 채워서 몇 년 쓰다 보니 책까지 냈으니까.


살다 보면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질 때가 있다.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문제와 아픔, 고통이 찾아올 때 저 T가 필요하다. 영혼에 문신처럼 새기면 얼마나 용기가 날까?


믿자. 현피를 떠도 꿀릴 게 없다. 나는 성공한 네가, 돈 많고 글 잘 쓰고 대단한 네가 지금 내 앞에 있어도 꿀릴 게 없다. 난 100km 울트라마라토너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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