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의 달 자도 모르는 사람아

by 러너인

터널을 빠져나오니 비가 쏟아진다. 폭우, 새로운 세상이다. 분명히 들어갈 땐 맑았다. 터널 하나를 사이에 둔 두 개의 서로 다른 세상. tv 속 열대우림처럼 들이치는 빗줄기.. 본넷을 두드리는 시원한 빗방울 소리.

"엄마. 전 가끔 이런 생각을 해요. 내가 40대가 아닌 30대, 20대, 아니 10대에 달리기를 만났으면 지금쯤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적극적으로 인생을 살았을 테니 삶이 몇 배로 나아지지 않았을까..."


"아니다. 네가 인생의 시련을 거친 뒤 달리기를 시작해서 어릴 때 못 느낀 걸 지금 느낄 수 있는 거다. 모든 것은 때가 있다. 일찍 시작했다면 지금 같은 생각을 하지 못했을 거니 아쉬워할 것 없다."


"너 낳고 유명한 역술인에게 사주를 보았다. 너는 관운이 좋다고 했다. “법조인이나 작가의 재능이 있다고 했지만, 아빠는 소심한 네가 말과 글로 먹고살 수 있겠냐고 마음에 두지 않았다. 지금 너를 보니 사주가 맞는 것 같다."


우산. 비를 막아주는 도구. 내 인생에 비가 쏟아지던 날, 가장 세찬 비가 온몸을 때리던 날, 달리기를 만났다.


달리기와 친구가 되었다. 금세 사랑에 빠졌다. 매일 달리기를 시작했다. 비 예보가 떴다. 어쩌지? 비 오면 못 뛰는 건가? 검색을 했다. 우중런이 눈에 띄었다.


우중런. 비를 맞으며 달리는 기술. 옷이 젖으면? 러닝화는? 물웅덩이는? 걱정하지 마. 그런 걱정, 이제 내려놔도 돼. 넌 이제 그냥 ‘일반인’이 아니야. 너는 러너야.


첫 우중런. 집 안에서 창문을 연다. 후두두둑 빗소리. 그땐 몰랐다. 방구석에서 듣는 빗소리가 유난히 크다는 걸. 마음이 작아진다.


가지 말까? 이 날씨에 나가다니, 정말 미친 짓 같았다. 아니야. 그래도 나가보자.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아까 무조건 가기로 했잖아. 나가서 달리자. 마음을 다잡고 대문을 열고 나간다.


주차장을 지나 비가 쏟아지는 바깥으로 나간다. 천천히 다리를 든다. 웃음이 터진다. 이거 미쳤네? 엄청 쏟아붓는다. 나가자마자 쫄딱 젖었다. 옷이 젖을까 걱정할 필요도 없다. 물웅덩이 몇 개를 피했지만 결국 러닝화도 흠뻑 젖는다.


그래, 더 걱정할게 뭐 남았니? 옷, 러닝화... 쫄딱 젖으니 거칠게 없다. 웃으며 달릴 일만 남았다. 어릴 때 장난꾸러기 시절 외에 이렇게 비를 맞으며 뛴 적이 있는지.


이까짓 비를 뭘 그리 안 맞으려고 그렇게 난리를 피웠는지. 누군가라는 우산이 없으면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꽤나 오래 그렇게 살아왔다.


사람이 우산이라고 생각했던 때에는 사람이 내 행복을 결정했다. 내 행복이 다른 사람에게 달린 삶은 불행하다. 다른 사람이 우산을 씌워주길 평생 꿈꾸고 살았다.


고이 간직해 온 우산이 찢겨 너덜너덜해지고 더 이상 비를 막을 수 없을 때 나는 자기 연민이라는 일회용 우산을 꺼내어 겨우 비를 피했다. 출퇴근 버스도 비를 피하기 좋았다. 방 한 칸에 있다가 틈만 나면 도서관에서 비를 피했다.


세찬 비바람이 불면 우산은 이리저리 뒤집히고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그 순간 필요한 건 뒤집힌 우산을 이 악물고 끝까지 붙드는 두려움이 아니라, 망가진 우산을 던지고 비를 그대로 맞을 용기다.


삶에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강한 비가 쏟아질 때, 나는 붙잡고 있던 우산을 던졌다. 달리기라는 새로운 우산을 들었다. 고통을 피하려는 마음을 내려놓는다. 비를 맞아도 죽지 않는다. 고통을 피하지 않는다고 죽지 않는다. 사람이 장거리를 좀 달린다고 죽지 않는다.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게 두렵다고? 사람들과 함께 해도 죽지 않는다. 생각을 글로 쓰는 게 두렵다고? 네 생각을 글로 써도 죽지 않는다. 악플이 무섭다고? 악플 좀 달려도 죽지 않는다.


니체가 말했듯,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고통을 피하고 싶은 본능을 넘어 달린다. 달리기는 고통을 피하지 않는 기술이다. 고통은 나를 죽이지 못한다.


달리기의 달 자도 모르는 사람아. 빨리 뛰지 못하면 러너가 아니라고? 아직 멀었다. 살면서 비를 더 흠뻑 맞아야 한다. 더 외롭고 더 아파야 한다. 아이처럼 울면서 더 달려봐야 한다. 가끔 힘들땐 함께 달리기란 우산을 같이 쓰기도 하며.


P.S. 달리기의 달 자도 모르는 너에게 달리기의 리 자도 모르는 내가 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처음 5km를 달린 너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