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절하게, 솔직하게

완주를 선택한 나

by 지음

어둠이 짙게 내린 새벽이었다.

곤히 잠든 딸의 이마에 입을 맞춘 뒤,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 같은 도시로 발을 내디뎠다. 가볍게 조깅하며 출발선으로 향하는 길은 러너들이 내딛는 발소리와 거친 호흡만으로도 이미 생기가 넘쳤다. 부족한 잠에 몸은 다소 무거웠지만, 전날까지 나를 괴롭히던 불안은 고개를 감춘 채 고요했다.

어둠을 뚫고 밝게 빛나는 싱가포르 플라이어가 보였다.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출발선 앞은 가히 축제와 같았다. 어둠 속에서 사람들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밝은 표정만큼은 느낄 수 있었다. 웃고 있는 사람, 눈을 감고 숨을 고르는 사람, 조용히 스트레칭을 하는 사람. 각자의 방식으로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스피커를 타고 흐르는 비트가 심장을 깨웠다.


출발선 앞에 서서 한 번 더 운동화 끈을 고쳐 묶었다. 조여진 느낌이 발등을 타고 전해졌다. 괜히 부상이 있는 쪽으로 체중을 실어보았다가, 다시 균형을 잡고 통통 뛰어보았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출발선을 둘러싼 소란 속에서 나는 이상하리만큼 차분했다.


새벽 4시 30분.

러너를 위해 비워진 넓은 도로 위로 출발 신호가 울렸다. 세계 각지에서 모인 러너들이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튕겨 나가며 어둠 속 도로를 갈랐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몸을 맡긴 채 달렸다. 이에 응답하듯 발이 땅을 디딜 때마다 익숙한 리듬이 돌아왔다. 시계는 확인하지 않았다. 기록이 아닌 완주를 목표로 삼았기에, 속도보다 몸의 반응과 리듬에 집중했다.

10킬로미터 지점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숨은 고르게 이어졌고 심장은 안정적이었다. 수많은 러너를 추월하고 또 추월당하며 비교적 높은 순위로 달리고 있었다. 덕분인지 이른 아침 싱가포르의 초록이 유난히 선명해 보였다. 가든스 바이 더 베이를 가득 메운 가로수 사이로 스며드는 습한 공기, 물을 건네는 자원봉사자의 손짓, 이름 모를 이가 전해주는 응원. 그 모든 것이 나를 앞으로 밀어주고 있었다. 에너지 젤을 먹으며 확인한 속도는 나쁘지 않았고, 발목 또한 잘 버티고 있었다.

15킬로미터를 지날 무렵에도 컨디션은 좋았다.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생각했다.

‘무사히 끝까지 갈 수 있겠구나. 나쁘지 않은데?'

하지만 달리기는 늘 낙관의 순간을, 자만을 경계해야 한다. 몸은 정직하다. 방심의 대가는 날카롭게 자신을 드러냈다. 16킬로미터를 넘어서면서 발목 통증이 서서히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걸음을 이어갈수록 발목 안쪽을 묵직하게 조여 왔다. 익숙한, 하지만 결코 원치 않은 신호였다. 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18킬로미터를 넘기자 발을 디딜 때마다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20킬로미터 지점, 더 이상 달릴 수 없어 도로 옆에 잠시 멈춰 섰다. 주문을 외운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무리하지 않겠다고 어제 그렇게 다짐하지 않았던가.


내가 앞질렀던 러너들, 그리고 내 뒤를 따라 달리던 러너들이 하나둘 나를 지나쳐 갔다. 그들의 발소리가 멀어질수록 마음은 더욱 복잡해졌다. 포기했다는 자책이 스멀스멀 올라와 나를 괴롭혔다. 숨을 고르며 나를 지나치는 러너들에게 짧은 응원을 던지면서도, 속으로는 참고 달릴까 아니면 그만둘까 수없이 되뇌었다. 발목 부상 중에도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은, 그만두기엔 너무나 그럴듯한 변명처럼 느껴졌다.

빠른 판단이 필요했다. 하지만 걷다 서다를 반복하며 휴대폰 지도를 확인해 보니, 돌아가기 위해서도 호텔까지 20킬로미터를 넘게 가야 했다. 문제는 이른 새벽이라 대중교통조차 다니지 않았다. 가족들에게 완주 후 아침을 함께 먹자고, 조식 시간에 맞춰 도착하겠다고 말했지만 이미 맞추기 어려워 보였다. 휴대폰을 꺼내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발목이 아파서 달리기 어려울 것 같아'


곧, 아내가 문자를 읽었고 아이의 말을 대신 전한 답장이 왔다.


'아빠, 파이팅'


문자를 한 번 더 읽고 화면을 껐다. 차라리 확인하지 말걸 그랬다. 그 짧은 문장이 발목의 통증보다 더 무겁게 마음을 눌렀다.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걷는 동안 고개를 숙인 채 스스로에게 끝없이 질문을 던졌다.


왜 여기까지 왔을까.

나는 무엇을 증명하려 했던 것일까.


명쾌하지는 않았지만, 이 대회가, 단순한 기록 이상의 무언가로 남기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인정했다.


어느덧 22킬로미터 지점에 도착했다. 물을 한 컵 마신 뒤 잡념과 함께 발목을 가볍게 털어냈다. 그리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착지는 조심스러웠다. 속도는 눈에 띄게 느려졌고, 보폭은 짧아졌다.

발목만으로도 이미 너무 힘든 상황인데, 해가 떠오르며 기온도 올라가며 체온을 가파르게 끌어올렸다. 수분 고갈은 부상을 악화시키기에 충분했기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물을 마시며 버텼다. 더 나빠질 수는 없었다.

이내 가로등이 하나둘 꺼지고, 조용하고 지루한 시간이 이어졌다. 고개를 살짝 들어 앞을 보았다. 물안개 너머로 25킬로미터를 지나 반환점이 보였다.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던 아직 이른 아침 풍경도 눈에 들어왔지만, 그것을 감상할 여력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무거워지는 다리를 길 위로 천천히 옮길 뿐이었다. 오직 내 몸에만 집중했다. 그렇게 30킬로미터를 지나 도심에 진입하기 전까지는 긴 인내의 시간이 계속되었다.

좁아진 시야 너머 저 멀리서 시끌벅적한 응원 소리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도심에 진입하니 도로 양 옆을 가득 메운 응원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표정이 보였다. 급수대에서 물과 이온음료를 마시고 컵을 내려놓았다.


물이 튀는 소리가 들렸다.


땀방울이 온몸을 타고 흘러 팔뚝으로 떨어졌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숨통이 트이고 감각이 돌아왔다. 거짓말처럼 통증은 차츰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나는 다시 웃을 수 있었다.


35킬로미터를 지나자 이것이 러너스 하이(Runner’s High)인지, 아니면 꺼지기 직전의 마지막으로 타오르는 촛불의 심지 같은 상태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몸은 분명 지쳐 있지만, 마음만은 이상하리만큼 안정돼 있었다. 끝까지 가겠다는 약속만을 반복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결승선이 가까워질수록 응원 소리는 커졌고, 발걸음은 가벼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도를 올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41킬로미터, 42킬로미터.


이미 여러 번 포기하지 않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기분 나쁜 통증은 더 이상 나를 멈춰 세울 수 없었다. 점점 빨라지는 다리를 억눌렀다. 저 멀리 결승점이 보이자 그제야 빗장을 풀고 속도를 높였다.

결승점을 지나 숨을 고르며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메달을 목에 걸자 더는 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과 근육통과 함께 찾아왔다. 되돌아보면 싱가포르 마라톤은 가장 빨리 달린 대회도, 가장 완벽한 전략을 펼친 대회도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가장 처절하고, 가장 솔직하게 달린 대회였다.


멈추고, 걷고, 다시 달리며, 선택의 연속이었다.

극적인 희열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저 안도감 속에서 전화를 걸었다. 아니나 다를까 식사를 미루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에게 빨리 돌아가야 했다. 호텔에 도착해 짧은 샤워를 끝내고 가족과 함께 앉아 아침을 먹기 전, 나는 아이에게 메달을 걸어주며 조금 늦은 도착을 사과했다. 그들은 내가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웃으며 대단하다고 말했다. 그 순간, 이번 대회, 이번 여행이 정말로 끝났다는 걸 실감했다.

싱가포르에서의 마라톤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여행도 끝이 났다. 아직도 내가 왜 이렇게 무리해서 달렸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어쩌면 그 답은 평생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답을 찾아 달릴 것이다. 풍경을 눈에 담으며, 조금 느리게, 그리고 아주 오래도록.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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