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탄섬에 남겨둔 비밀
동이 트지 않은 이른 새벽, 5시 30분.
"일어날 시간이야."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몸을 돌려 다시 잠들고 싶었다.
하루 전, 조호바루에서 싱가포르를 거쳐 페리에 몸을 싣고 인도네시아 빈탄섬에 도착했다. 두 번의 국경을 넘는 동안 혹시 모를 일이 벌어질까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마치 잔뜩 부풀어 오른 풍선을 엉덩이로 눌러 버티고 있는 기분이었다. 호텔에 도착해 짐을 풀고 물을 한 잔 마신 뒤에야, 겨우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긴장을 내려놓은 뒤, 뜨거운 태양 아래서 유명 관광지를 돌아다니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가족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모두 조용히 잠든 밤이면, 나 홀로 피트니스 센터에 내려가 보강운동과 트레드밀 위를 달리며 몸과 마음을 정리했다. 낮에는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었다면, 밤은 오롯이 나에게만 남겨진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홀로 나만의 시간을 보내고 새벽이 되어서야 침대에 누웠는데, 벌써 일어나야 한다니. 많이 좋아졌지만 발목은 여전히 불편했고, 이런 상태로 나가도 될까 잠시 망설였다. 나갈까, 말까. 짧은 고민 끝에 조용히 옷을 챙겨 입고 신발끈을 질끈 묶었다.
조용한 도로 사이로 새소리와 벌레소리만 가득했다. 어둠을 가르는 가로등 사이로 손을 흔드는 나무 가지와 소심하게 아침 인사를 나눴다.
한 걸음, 두 걸음.
고요한 바닷가와 호수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바닷가라 그런지 사우나처럼 덥고 습했다. 앞으로 젖힌 고개를 따라 땀방울이 조용히 흘러내렸다. 일출을 보기 위해, 목적지도 없이 느리게 달렸다.
그러다 문득, 이미 밝아진 하늘을 보고 '너무 늦게 나온 건 아닐까' 생각했다. 아쉬운 마음에 운동이라도 할 생각에 바닷가를 빠져나와 도로를 따라 달렸다. 어디를 가야 할지 몰라 핸드폰을 꺼내 들었지만, 번화가를 향하기엔 너무 멀었고 이른 새벽의 리조트 주변엔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점점 지루해진 발걸음 끝에 멈춰 서서, 달려온 길을 돌아봤다.
그 순간이었다.
지평선 너머에서 붉은 태양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숨을 들이마시는 것도 잊은 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똑.
붉은 하늘과 초록의 숲, 푸른 바다와 노란 백사장, 검은 도로. 그 사이에 홀로 서 있는 나. 자연이 그려놓은 한 폭의 완성된 그림 속에 우연히 들어온 이방인 같았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천천히 온몸을 감쌌다. 아주 가끔, 황홀한 풍경을 달리다 보면 뚜렷한 이유 없이 눈물을 흘린 순간이 있다. 이날도 그랬다. 한 번 터진 눈물은 긴 시간 내 발을 잡았다.
지평선 너머 붉게 타오르던 해는 금세 산 꼭대기까지 올라 세상을 밝게 비추었다. 어둠이 물러난 도로에는 서서히 생기가 돌았다. 긴 터널을 빠져나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왜 눈물이 났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답답한 마음을 잠시나마 내려놓았다는 해방감이었다. 물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일상에서도 그랬다. 뮤지컬을 제작할 때도 다 잘될 거라는 뻔한 서사를 찾았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나 '고진감래(苦盡甘來)' 같은 이야기들. 현실은 그렇지 않더라도, 작품 속에서나마 끝내 이겨냈다는 결말을 보고 싶었던 것 같다.
바다를 등지고 녹음이 우거진 이곳에서, 그 누구에게도 말 못 한 내 걱정거리는 잠시나마 떠오르는 태양 뒤로 숨었다. 동화에서도 말 못 할 비밀을 대나무 숲에 털어놓듯, 나도 그랬다. 눈물에 마음의 짐을 담아 몰래 내려둔 기분이었다.
땀방울과 뒤엉킨 눈물을 훔치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해는 높이 떠오른 만큼 가파르게 기온이 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소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일상은 여전히 멀고 끝없이 험난하겠지만, 다시 돌아갈 힘을 얻은 셈이었다.
달리기는 혼자여도 좋고, 친구와 함께여도 좋다. 그리고 가족과 함께라면 더 좋다.
언젠가 이 길을, 이 새벽을, 가족과 나란히 달릴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그려보았다. 그날에는 오늘의 이 눈물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가족과 함께여도, 친구와 함께여도, 혼자여도 좋은 이곳.
내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돌아갈 힘을 얻었던 곳.
빈탄섬이다.
Runner's Tip
적도에 가까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는 해가 뜨고 지는 과정이 한국보다 훨씬 빠르다. 새벽 다섯 시에 달리기를 시작하여도 한 시간 남짓이면 태양은 이미 머리 위에 올라 있다. 낮에는 예상보다 이르게 찾아오는 강한 더위와 자외선을, 밤에는 조도가 낮아지는 구간에서 방향 감각을 잃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는 것이 좋다. 득히 러닝 전·후 수분 보충과 일출·일몰 시간을 고려한 일정 조정이 중요하다.
싱가포르에서 한 시간 거리에 관광 리조트 중심의 자연 유양지 빈탐섬과, 생활·상업이 발달한 활기찬 도시형 섬 바탐섬이 있다. 두 섬은 분위기와 러닝 환경이 뚜렷이 달라, 여행 성향에 따라 선택하는 재미가 있다. 싱가포르를 거점으로 한 러닝 여행을 계획한다면, 일정에 여유를 두고 함께 둘러볼 만한 선택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