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의 대가

달리기를 멈추고

by 지음

태양이 그 어느 때보다 무섭게 내리쬐던 오전 10시.


탁 트인 공간에서 땀방울로 옷을 적시며 달리는 것을 좋아한다. 장거리(LSD), 단거리, 고강도, 그리고 업힐 훈련까지. 목적지 없이 떠돌며 달리는 것을 특히 즐긴다. 운동은 달리기만 고집했다. 때문에 달리기는 비단 운동이 아니라 내 삶의 일부다.


그러나 달리기를 좋아하는 만큼 훈련을 견뎌낼 몸은 미처 만들지 못했다. 지독한 편식의 결과처럼, 어느 날 발목에 빨간불이 켜졌다. 무릎 수술 후 지금까지 쉼 없이 달렸지만 이렇게 끔찍한 부상은 처음이었다. 돌이켜보면 몸은 이미 여러 번 신호를 보냈다. 다만 나는 그 신호를 사소하게 취급했을 뿐이다.


주변 지인에게는 부상이 있으면 쉬라고 말하면서, 정작 나는 그러지 못했다. 지독한 통증 앞에서도 원인을 찾기보다는 금방 좋아질 거라 주문처럼 되뇌며 고통을 견뎠다. 대회를 앞두고는 병원을 찾아 두어 번 인대강화 주사나 소염주사 따위를 맞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신나게 달렸다. 달릴 수 있다는 사실이 회복의 증거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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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원인을 고치지 않으면 인대가 파열될 수 있다는 의사의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더 이상 몸이 견디지 못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내 러닝인생에 더 이상 주사치료는 없다'라고 다짐한 이유다. 주사는 쉽고 빠른 해결책처럼 보이지만, 반복되는 부상은 원치 않는 방향으로 날 밀어 넣을 것이 분명하다.


며칠 전 맞은 주사치료와 함께 '당분간 달리기는 하지 말라'는 처방이 있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온전히 쉴 용기는 없었다. 달리기는 정직한 운동이니까. 훈련한 만큼 늘고, 쉰 만큼 줄어든다. 그래서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를 피해 에어컨 바람이 서늘한 짐(Gym)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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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사람의 노력과 열정이 켜켜이 쌓여 진하게 배어 있는 땀 냄새나는, 그 공간에 내 땀방울을 조심스럽게 더했다. 어깨부터 허리, 엉덩이, 허벅지, 종아리 그리고 발목까지. 달리기를 대신해 달리기를 위한 보강 운동을 시작했다. 겁 없이 쇠질을 시작하자 거울 속 나는 속절없이 부들거렸다. 러닝이 아닌 역기를 든 모습은 낯설었다.


'이 고통을 이겨내야 더 오래, 더 빨리 그리고 더 멀리 달릴 수 있다.'


문장을 되뇌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숨이 거칠어질수록, 내가 놓치고 있던 시간이 조금씩 되돌아오는 느낌이었다.잠깐이지만 트레드밀에도 올랐다. 달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걸음걸이와 발구름, 전반적인 러닝 자세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걷는 것보다 느린 속도였지만,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한 시간이었다. 한 발, 한 발이 조심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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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에서 나와 간단히 샤워 후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수영장에 뛰어들었다. 물속에서 바라보는 뙤약볕이 야속하게 반짝거렸다. 차가운 물속에 몸을 숨기고 있으니 물결을 따라 흩어지는 태양빛이 천천히 시야를 채웠다.


몸을 뉘자 발목을 짓누르던 체중은 사라졌다. 땅에서 벗어난 순간, 통증도 잠시 숨을 고르는 듯했다. 오직 호흡과 물살을 가르는 소리만 첨벙거리며 귓가를 채웠다. 발을 세게 구르는 대신, 물을 부드럽게 밀어내며 심장 박동 소리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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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지는 물살 사이로 조급함이 씻겨 나간다. 땅을 밟아야 한다는 고정관념도 내려놓았다. 수영도, 보강 운동도, 심지어 휴식조차 더 멀리 달리기 위한 일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금 더 단단한 러너가 된 것이다.


물속 훈련은 눈에 띄는 성과를 볼 수 없지만, 이 시간이야 말로 나를 다시 달리게 해 줄 것이라 믿는다. 물장구나 치려고 물속에 들어온 건 아니라는 생각에 어깨가 떨어질 듯 팔을 저었다. 그럴수록 숨은 거칠어졌고, 숨통이 끊어질 듯 몰아쉬었다. 이상하게도, 그 거친 호흡은 불안이 아닌 안도감으로 다가왔다.


이 호흡이, 언젠가 다시 서게 될 출발선에서 나를 지켜줄 것이다. 싱가포르 마라톤에서도, 그 이후 어떤 대회에서도.


이제 물 밖으로 나갈 시간이다.


그리고 다시 도로 위에 설 때, 나는 예전보다 느릴지 몰라도 훨씬 오래 달릴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집착 대신 균형을, 기록 대신 몸을 선택할 용기를 이미 얻었기 때문이다.


Runner's Tip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는 단백질 파우더뿐 아니라 전해질 음료, 러닝 전후 간편 보충식 자체가 제한적이다. 급하게 필요한 운동 용품이 있다면 데카트론(Decathlon)이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다. 가성비 좋은 러닝 용품에 합리적인 보충제가 있다. 단, 선택지가 많지 않다. 가격도 한국보다 비싸니, 장기 여행을 계획 중이라면 한국에서 챙겨 오는 것이 좋다.


싱가포르의 경우 편의점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어 접근성은 좋다. 하지만 가격이 우리나라의 두세 배는 족히 넘으니 비상용으로만 활용하는 것이 현명하다. 필요하다면 삶은 달걀, 닭고기 또는 생선요리, 코코넛 워터와 같이 현지 식재료로 대체하는 방법도 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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