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없는 도시

문화와 문화 사이를 가로지르다

by 지음

싱가포르에서의 첫 달리기는 유난히 즐거웠다.

어디서나 러너와 눈인사를 나눌 수 있고, 발밑을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될 만큼 고르게 정돈된 인도 덕에 마음이 놓였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오토바이나 자동차를 경계할 필요도 없었다. 유명 관광지를 따라 짧게 달릴 수도 있고, 강이나 바다, 숲길을 따라 교통 신호의 방해 없이 원하는 만큼 길게 달릴 수도 있다. 이온음료나 에너지 젤, 단백질 파우더까지. 필요한 것이 있다면 편의점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발목에 남아 있던 불편함마저 잠시 잊게 만드는 도시였다. 달리는 동안 멈추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이 먼저 몸을 움직이게 했다. 숨을 고르며 만나는 싱가포르는 여러 얼굴을 갖고 있었다. 입이 떡 벌어지는 랜드마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높은 빌딩 숲 뒤로는 고즈넉한 과거가 자리하고 있었다. 조금만 발길을 옮기면 차이나타운, 리틀 인디아, 아랍 스트리트, 하지 레인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몇 킬로미터 사이에서 전혀 다른 문화와 분위기가 교차하며, 마치 세계 여행을 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우거진 초록의 공원은 삭막해지기 쉬운 도심 속 달리기에 숨 쉴 틈을 만들어 주었다.

빠르게 스치면 하나의 도시였고, 천천히 지나면 수많은 도시가 겹쳐 있었다. 호흡이 거칠어질 즈음, 형형색색의 그라피티로 장식된 하지 레인에 이르렀다. 강렬한 네온사인 사이로 들려오는 빠른 리듬의 음악과 사람들의 웃음소리에 몸을 맡기며 호흡을 고르니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먹거리와 마실거리가 넘치는 이곳의 풍경은 얼마 전 달렸던 말레이시아 말라카를 떠올리게 해 묘하게 반가웠다.


리틀 인디아의 공기는 달랐다. 사원 앞에 놓인 꽃과 향신료 냄새가 뒤섞인 탓인지, 시간마저 느리게 흐르는 듯했다. 읽을 수 없는 간판 아래 조용히 앉아 있던 사람들, 맨발로 오가는 이들을 바라보며 마치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시공간을 달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어 붉은빛으로 물든 차이나타운을 지났다. 음식 냄새가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문득 이 도시는 이방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화와 종교, 언어가 달라도 서로를 침범하지 않는다. 각자의 영역을 존중한 채 나란히 존재하고 있었다. 빠르게 달려도, 천천히 머물러도 눈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편하게, 더 즐겁게 달렸는지도 모르겠다. 발걸음은 공간에 따라 자연스럽게 느려졌다가 빨라지기를 반복했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 저 멀리에서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 온 듯한 거대한 인공 나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귓가를 채우던 도시의 소음은 점차 잦아들고, 그 자리를 습한 초록의 공기가 대신했다. 뜨거운 아스팔트 위 화려한 도심과 이국적인 거리를 지나, 인공의 숲으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이제 마라톤 대회가 코앞이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발목 부상, 그리고 온전하지 않은 몸으로 출발선에 서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럼에도 ‘싱가포르 마라톤’에서 수많은 러너와 함께 이 구간을 달릴 수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과 설렘이 동시에 밀려왔다. 차라리 대회가 오늘이면 좋겠다는 조급함이 스쳤다.

하지만 시간은 언제나 정직하게 흐른다. 몸과 마음이 준비될 틈을 남겨둔 채, 서두르지 않고 제 속도로 나아간다. 그렇게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호텔로 돌아와 하루를 가지런히 매듭지었다.


며칠 뒤면 초록과 빛이 교차하는 그곳에서,
나와 싱가포르의 하루는 또 다른 속도로 흐를 것이다.


Runner's Tip

전통 사찰과 현대적인 카페가 공존하는 차이나타운(Chinatown)을 달린다면 이른 아침 러닝을 권한다. 낮에는 인파로 붐비지만, 새벽녘엔 붉은 등 아래 고즈넉한 상점가를 오롯이 즐길 수 있다. 인근 사우스 브리지 로드(South Bridge Rd)를 따라 달리면 불아사와 힌두 사원을 동시에 지나는데, 짧은 거리 안에서 서로 다른 종교와 문화가 겹쳐지는 이색적인 경험을 할 수 있다.


리틀인디아(Little India)에서 풍기는 강렬한 향신료와 화려한 색감이 오감을 자극하는 코스다. 보행로가 비교적 좁고 불규칙한 편이라, 탐험한다는 기분으로 천천히 달리기를 추천한다.


황금빛 돔이 빛나는 술탄 모스크가 있는 아랍스트리트 (Arab Street) 역시 이국적인 풍경을 느낄 수 있다. 비교적 한산한 아침 시간대에 가볍게 달리기 좋으며, 러닝 후 근처 찻집에 들러 따뜻한 테 타릭(밀크티) 한 잔으로 숨을 고르기에도 제격이다.


하지레인(Haji Lane)은 감각적인 그라피티가 가득한 짧은 골목이다. 단독 코스로는 아쉽지만, 아랍스트리트와 자연스럽게 연계해 달리기면 좋은 변주가 된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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