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선 앞에서
대회를 하루 앞둔 저녁.
해가 완전히 지기 전, 운동화를 신고 싱가포르의 대표 랜드마크 중 하나인 가든스 바이 더 베이(Gardens by the Bay)로 향했다.
대회를 준비하기 위한 훈련도, 그렇다고 회복을 위한 달리기도 아니었다. 부상으로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과 정리되지 않은 불안한 마음을 땀방울에 실어 달래고 싶었다. 시계와 음악마저 내려놓은 채 차분하게, 그렇게 달려 나갔다.
얼마를 달렸을까, 가든스 바이 더 베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성한 초록의 나무 사이로 나무처럼 보이지만 나무가 아닌, 자연처럼 숨 쉬지만 철저하게 설계된 건축물, 어둠 속에서 질서 정연하게 빛나는 슈퍼트리 그루브(Supertree Grove)가 보인다. 철골로 세워진 차가운 기둥 위로 식물들이 줄기를 뻗어 올린 모습이 기이했다. 하지만 그 모습과 불빛은 마치 주사 치료의 힘을 빌려서라도 다시 출발선에 서려는 나의 마음과 닮아 있었다. 나를 응원하는 것 같았다.
공원에는 저마다 다른 이유로 하루를 정리하러 나온 사람들이 흩어져 있었다. 산책하는 연인, 벤치에 앉아 휴대폰을 내려다보는 남자, 풍경을 바라보며 조용히 음악을 듣는 여인. 나 역시 그들 틈에서 내일 준비하고 있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숨을 곳도 없다. 내가 선택한 길이니 저 나무들처럼 묵묵히, 그리고 강인하게 땅을 딛고 나아가야 했다. 마음속 깊이 웅크리고 있던 불안을 그 불빛들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 내려두었다. 슈퍼트리 사이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땀이 식으며, 불안도 함께 조금씩 식어갔다. 물론, 발목은 여전히 불안했다. 하지만 앞으로 달릴 날이 더 많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무리하지 말고 즐겁게 달리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발길을 옮기자 다리 하나가 나타났다. 풍경이 변하고 F1 피트 빌딩(F1 Pit Building) 앞에 도착했다. 길을 따라 흐르듯 왔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는 두려움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나는 텅 빈 출발선 앞에 한참을 멈춰 서 있었다. 관중도, 음악도, 긴장감도 없는 그 자리는 적막했다. 문득 달리기를 처음 시작했던 어느 날을 떠올랐다. 기록도, 대회도 모르던 시절. 그저 건강해지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신발 끈을 묶었던 그날. 만약 이번 대회에서 또 무리해 기록을 향해 달린다면, 내 발목은 무너질 것이고, 달리기의 목적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무리해도 안 된다. 완주보다 중요한 것은 결승선을 통과한 뒤에도 다시 달릴 수 있는 몸으로 돌아오는 것임을 또렷하게 마주했다. 부디 결승점을 지나 웃을 수 있기를, 그저 내일 하루가 무사히 끝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완전히 어둠이 내리고, 한층 눅눅해진 공기를 뒤로한 채 호텔로 돌아와 신발을 벗었다. 이제 한 달여 이어진 여행의 끝이 정말 가까워졌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침대 옆에 정리해 둔 내일 입을 옷가지와 신발을 바라보며 조용히 숨을 골랐다.
내일, 나는 완벽하지 않은 상태로 출발선에 설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나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Runner's Tip
마리나베이 & 가든스 바이더 베이는 싱가포르의 화려한 스카이라인을 입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코스다. 마리나베이 샌즈를 중심으로 한 수변 산책로와 가든스 바이더 베이의 거대한 슈퍼트리 사이를 달리는 기분은 비현실적이기까지 하다. 낮에는 그늘이 거의 없어 강렬한 태양빛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므로, 일출 직후나 일목 이후 달리는 것을 추천한다.
이스트 코스트 파크(East Coast Park)는 싱가포르 러너들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해안선을 따라 직선으로 길게 뻗은 코스는 시야가 탁 트여 있어 개방감이 압도적이다. 한쪽에는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다른 한쪽에는 울창한 나무들이 이어져 싱가포르 내에서 가장 쾌적한 러닝 환경을 제공한다. 러닝 후 근처 푸드센터에서 즐기는 음식은 이 코스만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MRT 퍼플라인(Purple Line / North East Line Corrdor)을 따라 달리는 코스다. 수로와 공원, 주거 지역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어 러너에게 특히 사랑받는다. 풍골(Punggol) 지역의 수변 경로는 평탄하게 뻗어 있어 장거리 훈련에 적합하다. 관광지가 아닌 주택단지에서 소박하고 정겨운 풍경을 느낄 수 있다.
트레일 러닝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레일 코리도어(Rail Corridor)를 빼놓을 수 없다. 과거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를 잇던 철길을 생태 통로로 재정비한 곳이다. 도심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녹색의 선로 위를 달리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철교와 간이역의 흔적이 보존되어 있어 빈티지한 매력을 풍기며, 길 양옆으로 울창한 열대 우림이 펼쳐져 도심 속 허파 역할을 한다. 바닥은 비포장 흙길이 섞여 있어 로드 러닝과는 또 다른 재미를 준다. 편의시설이 많지 않고 야간에는 조명이 부족한 구간도 있으니, 수분 보충과 안전에 대한 준비는 필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