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의 덫

찬란한 기록, 위험한 오만

by 지음

시계를 조금 더 되돌려 보자.


지난여름, 뙤약볕 아래서 쉼 없이 달린 대가로 검게 그을린 피부에는 시계를 풀어도 풀 수 없는 영광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도 그럴 것이 생에 첫 풀코스였던 2024 JTBC 서울마라톤에서 다소 아쉬운 3시간 18분의 기록으로 완주했는데, 1년 전 나와 지금의 내가 나만 아는 진검 승부를 앞두고 있었다.


02:48:39


2025 JTBC 서울마라톤에서 새로운 PB(Personal Best)를 달성했다. 며칠간은 눈앞이 캄캄할 정도로 황홀했다. 몇 번이고 해죽 거리며 기록을 확인하고, 주로 사진과 영상을 찾아봤다. 그렇게 그간의 노력을 보상하듯, 그 기쁜 마음을 안고 여행을 시작했다.

처절했던 그날

마라톤 후 충분히 쉬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행이 시작하자마자 조호바루에서, 싱가포르에서 휴식 없이 꾸준히 달렸다. 풀코스 후 하루 이틀은 쉬어야 했는데, 몸이 충분히 탄탄해졌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열흘쯤 지났을까, 몸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


달리던 중, 나도 모르게 탄식이 새어 나왔다. 발목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통증이 시작되었다. 훈련 후 으레 찾아오는 통증이라고 생각했다. 두어 달 전, 인대 강화 주사와 소염 주사도 맞지 않았는가. 이렇게 부상이 발생할 리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감이 아닌 오만이었다.


날이 가도 통증은 줄지 않고, 붓기는 눈에 띄게 심해졌다. 발목은 분명한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챙겨 온 소염진통제를 며칠간 먹어도 소용없었다.


하루, 이틀. 발목에서 인대를 찾을 수 없었다.

사흘, 나흘. 통증으로 걷는 것조차 쉽지 않다.

닷새, 엿새. 자다 깨기를 반복한다.


이쯤 되면 멈췄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당연한 결과일지 모르겠다. 풀코스를 뛴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충분한 휴식 없이 습관처럼 달렸다. 쉬지 않으면 부상이 올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했다. 알면서도 외면했다. 그렇게 부상을 키웠다. 하지만 그럴 만한 이유는 있었다.


'2025 스탠더드차타드 싱가포르마라톤'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고, 달력은 나를 재촉했다. 휴식이나 가져온 약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착잡한 심정으로 병원으로 갔다. 몇 시간을 기다려 의사를 만났지만, 의사는 내 발목을 오래 보지 않았다. 그리고 차가운 진단이 내려졌다.


"이유는 알죠? 염증이 너무 심해요. 달릴 수 있지만, 지금 달리면 더 오래 못 달립니다. 끊어지면 수술밖에 방법이 없어요."


또다시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미 알고 있지만, 애써 믿고 싶지 않은 말이 의사의 입에서 느리게 흘러나왔다.


"주사로 한시적으로 염증을 잡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치료는 아니에요. 오히려 부작용 때문에 부상 부위가 더 약해질지 모릅니다. 그러니, 쉬세요. 그리고 왜 다쳤는지 공부하고 고치세요."


환자를 걱정하는 의사의 친절한 조언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사를 맞았다. 그렇게 쉬운 길을 선택했다. 금방 괜찮아질 거라 생각하며, 의사의 말을 흘려버렸는지 모르겠다. 주사액과 함께 기분 나쁜 뻐근함이 내 발목을 타고 올라와, 온몸을 천천히 휘감았다.


며칠 남지 않은 대회에서 새로운 기록을 만들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다만, 여기까지 와서 멈추는 게 두려웠다. 완주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왜 이렇게까지 몰아붙였는지, 명확한 이유를 찾지 못 한채 병원을 나서며, 탄식에 가까운 다짐을 했다.


'두 번 다시 스테로이드 주사는 맞지 않으리'


더 건강하게, 더 오래, 더 멀리, 더 빨리 달리기 위해 마음을 고쳐먹었다. 보강운동을 하고, 수영과 사이클을 활용한 크로스 트레이닝을 훈련 프로그램에 넣었다. 그리고 매주, 하루의 휴식을 다짐했다.

기록은 달콤하고, 숫자는 언제나 나를 앞질러 유혹했다. 하지만 기록은 목표가 아니라 결과일 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내가 달리는 이유는 목표가 아니라, 건강이 목적이라는 사실을 다시 상기했다.


이번 여행을 통해 숫자의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다.


휴식도 훈련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나는 주사 바늘을 통해 몸속에 진하게 새겨 넣었다.


그렇게 나는 그 덫의 모양을 분명히 기억하게 되었다.


Runner's Tip

해외여행 중에는 아무리 조심해도 예기치 않게 병원을 찾게 되는 순간이 생긴다. 조호바루에서 비교적 접근성과 신뢰도가 높은 의료기관으로는 KPJ(KPJ Johor Specialist Hospital)이 있다. KPJ 병원은 말레이시아 전역에 지점을 둔 대표적인 민간 병원 체인이다.


접수와 진료를 위해서는 여권 원본 지참이 필수이며, 예약 없이도 현장 접수가 가능하다. 다만 현장 접수의 경우 대기 시간이 길어질 수 있다.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영어로 가능하지만, 증상을 영어로 간단히 메모해 두면 진료가 한결 수월하다.


말레이시아는 외국인 관광객에게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진료 및 검사비가 높게 나올 수 있다. 단순 진료라도 비용 부담이 생길 수 있으므로, 출국 전 여행자 보험 가입은 필수다. 특히 러닝, 트레킹 등 활동량이 많은 여행이라면 상해질병 보장 항목을 꼭 확인해 두는 것이 좋다.


병원 진료는 여행의 흐름을 잠시 멈추게 하지만, 몸을 지키는 선택이 된다. 낯선 도시에서의 러닝일수록, 무리하지 않고 필요할 때 도움을 받는 용기도 준비해 두자.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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