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한 돌길 위에서

말라카(Melaka)의 소박한 풍경들

by 지음
어둠이 내려앉은 말라카는 아름다움이 꽃핀다

이곳은 러너라면 꼭 한 번쯤 달려봐야 할 작은 항구도시다. 특히, 숫자에 집착하는 러너라면 말이다.


잘 정돈된 주로 때문도, 한적한 공원이 있어서도 아니다. 그렇다고 입이 쩍 벌어질 만한 랜드마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 도시는 달리기 좋은 조건을 거의 갖추지 않은, 정돈되지 않은 풍경과 투박함으로 기억된다. 어둠이 내린 저녁, 말라카 강에 펼쳐진 각양각색의 이국적 정취를 경험한다면 불편한 도로는 고마움의 대상이 된다.


말라카는 여러 제국의 생채기가 켜켜이 쌓여 있다. 과거 이곳을 지나지 않고서는 중국과 인도, 중동과 유럽을 오갈 수 없었던 해상 무역의 심장이었다. 물건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며, 권력자와 자본이 충돌했던 다문화 도시.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일본까지. 수많은 나라가 이곳을 탐닉하며 자신들의 흔적을 남겼다. 시간이 흘러, 싱가포르가 무역 중심의 기능을 대신하며, 말라카는 화려했던 무역항의 기능을 온전히 내주었다.


그러나 중심에서 밀려났다고 해서 시간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곳의 시간은 서두르지 않고, 겹겹이 쌓인 채 남아 있었다.


기능을 잃었다고 매력까지 잃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형화되지 않은 시간들이 도시의 매력이 되어 곳곳에서 흘러나온다. 불규칙한 보도블록과 갑자기 좁아지는 인도, 예고 없이 튀어나오는 골목길은 분명 달리기에는 불친절하다. 러닝화 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감각은 기록보다 오래 남았다. 그 투박한 흔적이야말로, 말라카가 견뎌온 세월의 촉감처럼 느껴졌다.


이곳은 기록을 위해, 훈련을 위해 달리는 장소가 아니다. 속도를 정해두고 밀어붙일수록 도시는 등을 돌린다. 대신 뛰다 걷다를 반복하며, 멈출 준비가 되어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의 속살을 보여준다. 사람들 사이를 스치며 조심히 달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속도가 늦춰지고, 그제야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이 도시가 가진 색과 소리, 냄새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말라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타밍 사리 타워(Menara Taming Sari)를 지나, 왕립 해양 박물관의 거대한 볏짚 배 옆을 달린다. 붉은빛이 감도는 네덜란드 광장을 지나 관광객으로 꽉 찬 존커 워크(Jonker Walk)로 이어지는 큰길은, 인파에 몸을 실는 코스가 된다.

조금 더 차분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싶을 때는 말라카 강변 인도를 따라 달리면 된다. 강물 위로 늘어진 조명과 노천 식당의 소음이 뒤섞여 흐른다. 규칙 없는 빛과 소리가 오히려 발걸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낡은 벽화에 남은 색 바랜 그림들,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저녁을 먹는 노천 식당의 손님들, 야시장의 인파와 그 사이를 가르는 맛깔스러운 음식 내음. 낮게 내려앉은 건물들, 비릿한 냄새를 품은 강물, 그 위로 반사되어 흔들리는 형형색색의 불빛까지. 이 모든 조각이 겹치며 내 달리기와 함께했다.


도시는 달리는 나를 배경으로 삼았고, 나는 그 배경 속을 조용히 통과했다.

어둠이 내린 말라카

강변에 사람들이 몰려 있으면 그 틈에 섞여 잠시 서 있기도 했다. 카메라를 든 사람들 옆에 나란히 서서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 그 순간만큼은 러너도, 여행자도 아닌 하나의 구경꾼이 되었다. 뛰어야 할 이유보다 이 도시를 느끼고 싶다는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다.


빨리 달릴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속도를 낮추고 멈춰 서자 비로소 말을 걸어왔다. 바람에 흔들리는 강물, 식당 주방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웃음. 말라카에서의 러닝은 이 도시가 쌓아온 시간을 나눠 갖는 시간이었다.


이 도시는 냉정하고 정직한 숫자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도록 친절하게 도와주었다. 속도나 거리는 집으로 돌아가면 얼마든지 다시 붙잡을 수 있다. 하지만 숫자를 내려놓고 달린 이곳에서의 기억은 나를 더 오래, 건강하게 달리게 할 것이다. 내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들은 숫자 너머에 있으니까.


내 몸을 타고 느리게 흐르는 땀방울이 강물에 떨어져 빛과 섞이는 밤이다.


Runner's Tip

말라카의 도심은 아담하여 운동화 한 켤레만 있다면 어디든 닿을 수 있다. 출발 지점은 말라카 메가몰(Dataran Pahlawan Melaka Megamall)이 가장 무난하다. 쇼핑몰 앞 광장은 러닝 전 준비 운동을 하기에 충분히 넓고, 접근성도 좋다.


이곳에서 왕립 해양박물관, 네덜란드 광장, 존커워크, 말라카 강변 순으로 이어 달리면 말라카의 과거와 현재를 한 번에 훑을 수 있다. 전체적인 거리는 무리 없이 즐길 수 있지만, 보도블록이 고르지 않고 관광객이 많아 펀 런에 적합하다.


러닝을 마쳤다면, 왕립 해양박물관 인근 야시장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춰보자. 현지인들 사이에 섞여 먹는 간단한 식사가 이 도시를 가장 멋지게 즐기는 방법이다. 조금 더 차분한 분위기를 원한다면 말라카 강변 식당을 추천한다. 강물 위로 반사되는 불빛을 보며 식사를 하면, 방금 달렸던 코스가 천천히 복기된다.

맥주 한 잔이 당긴다면 로롱 잠바탄(Lorong Jambatan) 골목의 작은 펍도 좋다. 반대로 사람 냄새가 그리운 날이라면, 다시 존커 거리 야시장으로 발길을 돌려 인파에 몸을 맡겨보는 것도 좋다.


금요일 연재
이전 07화어둠 속 나의 실루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