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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RUN RUN

「나의 근원지를 찾아」

#12. ' 어릴 적 받은 세뱃돈은 다 어디로 갔을까?'

by 달리는김작가


설이다.


이번에도 무사히 내려왔다.

다행히 이른 출발 덕분에 고속도로는 막히지 않았다.

고향의 이름이 보이는 톨게이트에 들어서는 순간, 기분이 좋아진다. 큰 숨을 들이켜 깊숙 공기를 들여 마셔 본다. 맞다. 따스한 이 바람!

여기는 내 근원지, 고향이 확실하다.


차를 운전하고 내려오다 문득, 언제까지 이렇게 고향을 찾아올까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내가 죽기 전까지 쭉 이 순례는 이어지겠지.

버리고 싶은 나의 모습과 버리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 이 두가지 모습을 다 길러낸 나의 근원지.

엑셀을 세게 밟아, 오늘도 나는, 이 곳에 왔다!

< 귀향길, 아름다운 해돋이 >

새 옷과 세뱃돈에 들떴던 어린 시절은 훌쩍 지났다.

도대체 이제 내 나이가 얼마가 되는 거지?

나이를 헤아리기도 머뭇거려지고, 문득 떡국을 더 이상 먹고 싶지가 않아진다.


어느 새, 내 옆 자리에는 올해로 8살 되는 아이가 앉아 있다.

아이는 어른들에게 받은 세뱃돈으로 '신상 레고'를 살 생각에 한껏 들떠 있다. 혹시나 내가 사 주겠다는 약속을 어길까봐 수 차례 확인 중이다. 그 순진함이 한없이 귀엽다.


그리고보니, 내 어릴 적 받았던 세뱃돈들이 궁금하다. 그 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세뱃돈을 모조리 엄마에게 상납했던가? 안타깝게도 그 어떤 기억도 떠오르지 않는다. 대적할 수 없는 무소불위의 힘을 지니신 엄마 아래에서 자란 나의 어린 시절에 비하면, 우리 아이는 옛날 표현으로 '계탔다'이고, 요즘 표현으로 말하자면 '대박'이라고나 할까?세뱃돈을 엄마에게 상납하기는 커녕 그 돈으로 비싼 레고를 곧 손에 쥐게 생겼으니, 나 조차도 아이가 부럽다.

내게 내일 사러갈 것을 몇 차례 확인다짐 받은 후, 한껏 안심하고 고향집 마당에서 뛰어노는 아이를 보다 보니, 문득 어릴 적 내 모습이 오버랩된다.


엄마 홀로 살고 계신 이 집은, 한 번 다시 짓긴 했지만 내가 태어난 곳이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집 한 모퉁이에 있던 엄청 큰 소나무가 눈에 선하다. 누군가에게 우리집을 설명할 때는 꼭 '큰 소나무 있는 집이요' 가 따라다녔다. 그리고 마당 한 켠에 동물을 좋아하신 아버지가 키우게 해주셨던 다람쥐들과 잉꼬-십자매와 같은 각종 새들이 떠오른다. 귀여운 토끼들과 꼬리 살살 흔들던 하얀 '해피'라는 이름의 개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심심할 땐, 이층 옥상에 올라가 놀았다.

빨래를 널어 놓은 줄을 피해, 한 쪽 바닥에 자리를 펴고 누워 바람에 펄럭이는 옷들을 바라보다,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다 스르르 잠깐 잠들었던 기억. 잊은 줄 알았던 그 기억들이 소록소록 떠오른다.


어젯밤에는 고향 내려온 김에, 대학때 알고 지냈던 친구를 오랫만에 다시 만나서 고향의 여기저기를 함께 둘러보았다. 서울에 비하면 정말 손바닥만한 크기이다. 옛날보다는 도시가 재정비되고 커지긴 했지만, 돌아다녀도 돌아다녀도 거기가 거기이고, 거리의 낮은 건물들이 한없이 정겹다. 예전 다녔던 대학교도 다시 둘러보니 소소하게 얽힌 추억들이 어제처럼 눈에 선하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도심 한가운데 있는 낮은 산정상에도 올라가, 그 곳에 있는 정자에서 반짝거리는 도시 전체를 한 눈에 담아보기도 했다.


각종 동물들과 즐거웠던 나의 코흘리개 어린시절과 니체와 데미안에 빠져 나름 심각했던 사춘기시절, 그리고 그저 콧대만 높았던 대학시절, 이 모든 게 파노라마로 이어져 머릿속에 재상영된다.

< 고향의 밤 풍경 >

싫건 좋건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들어 준 나의 소중한 근원지. 태어나고 자란 이 곳을 누가 뭐라 해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어린 시절 뛰어 놀면서 자연스레 체득한 그 모든 것들은, 나의 또 다른 감성세포로 온 몸에 깊숙히 박혀있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생각해 볼 때가 있다.

어느 시인의 시 구절을 인용하면,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고향의 기운'이다. 이 곳의 물과 바람, 하늘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대도시의 쓸쓸한 뒷골목을 거닐 때, 어느 날 유난히 밝은 달빛 아래를 거닐 때, 간간 고향이 떠오른다. 분명 나는 가슴에 이 곳을 안고 평생 살아가리라.


오늘도 나는, '나의 근원지'에 발을 디디고 서서, 흘러가는 구름을 쳐다보고, 불어오는 바람을 맞아본다. 그리고, 한 살 더 먹어 더욱 서늘해진 내 눈가에 이 곳의 모습들을 하나하나 꾹꾹 눌러 담아본다.


이제 다시 내 일터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온다.

번잡한 도시로 말이다.

숨막힐 때 가끔씩 나는, 꺼낼 것이다.

이 곳의 공기를.

이 곳의 바람을.


그러기 위해 떠나기 전 지금 나는, 깊숙깊숙 심호흡으로 이 사랑스런 근원지의 모든 것을 들이키고 또 들이키는 중이다.



<2016. 2. 9. 순천의료원 앞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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