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도종환)'
“가장 뜨거운 시간이 지나간 뒤에 더는 참을 수 없어 쏟아지는 빗줄기처럼 시는 제게 그렇게 다가왔습니다. 시가 빗줄기처럼 쏟아져 저를 때리면 저도 그 비를 다 맞았습니다. 치열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절절하지 않으면, 가슴을 후벼 파는 것이 아니면, 울컥 치솟는 것이 아니면 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래서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가 나왔나 보다. 누가 읽어도 가슴에 와 닿는 시가. . .
시인은 서문에서 시를 ‘말로 만들어진 그림’이라고 말하며, 저렇게 강렬하게 시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고 있었다.
문득, 시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맞닥뜨리는 삶에서도 이런 강렬함은 정녕 필요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추구하는 일에서, 견딜 수 없이, 참을 수 없이 쏟아지는 빗줄기와 같은 그 무언가가 내린다면 얼마나 기쁠까?흠뻑, 그 안에서 나도 취하고 싶다. 그 미쳐 버릴 것 같은 순간을 인생에서 한 번쯤은 만끽해 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 하루하루, 내 모든 감성과 이성을 열어 밤을 지새우고 또 지새울 일이다.
불면의 밤과 고독의 시간을 이겨내고, 원하는 일에 한없는 몰입으로, 그 피말리는 순간들을 넘어서야 '울컥 치솟음'을 맞이 할 수 있으리.
내 안으로 보다 더 깊이 침잠할 것.
그 무엇에도 두려워하지 말 것.
끝으로
한껏
한껏
흔 들 리 고
흔 들 리 기......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바람이 오면
바람이 오면
오는 대로 두었다가
가게 하세요
그리움이 오면
오는 대로 두었다가
가게 하세요
아픔도 오겠지요
머물러 살겠지요
살다 간 가겠지요
세월도 그렇게
왔다간 갈 거예요
가도록 그냥 두세요
◆ 산 너머에서
그가 뒤척이고 있나 보다
내 몸 어딘가 물소리 조그맣게 철썩이는 걸 보니
골짝에서 산 어깨까지 천천히 골 안개에 잠기듯
그리움에 몸 젖어 올라오는 걸 보니
그도 힘들게 여러 날을 보내고 있나 보다
바람도 없는 데 몸 자꾸 흔들리는 걸 보니
봉숭아 물든 손가락으로 물에다 무어라 썼더니
잔물결도 밤새도록 잠 못 들어하는 걸 보니
◆ 쑥국새
빗속에서 쑥국새가 운다
한 개의 별이 되어
창 밖을 서성이던
당신의 모습도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밤이면
당신의 영혼은
또 어디서 비를 맞고 있는가
◆ 꽃잎 인연
몸 끝을 스치고 간 이는 몇이었을까
마음을 흔들고 간 이는 몇이었을까
저녁 하늘과 만나고 간 기러기 수 만큼이었을까
앞강에 흔들리던 보름달 수 만큼이었을까
가지 끝에 모여 와 주는 오늘 저 수천 개 꽃잎도
때가 되면 비 오고 바람 불어 속절없이 흩어지리
살아있는 동안은 바람 불어 언제나 쓸쓸하고
사람과 사람끼리 만나고 헤어지는 일들도
빗발과 꽃나무들 만나고 헤어지는 일과 같으리
◆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 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 번쯤은 꼭 다시 걸어오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패여 있는 길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이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 길을 뭉턱 자르더니
저녁엔 헤쳐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 흔들리며 피는 꽃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 P.S: 최근 중요한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우울할 절친에게 이 글로 위로를…. 힘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