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캔디캔디(이라가시 유미코)' 눈물홍수記
'캔디스 화이트 아드레이'
이것이 그녀의 본명이다.
처음으로 알았다.
어렸을 적 TV에서 보았던 만화 <캔디>. 드문드문 생각나는 내 기억에는 '캔디'라는 이름만이 강렬히 머릿속에 있는지라, 한 번도 주인공의 풀네임이 있으리라고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캔디스 화이트 아드레이라…….'
호기심에 책장을 넘겨본다.
얼마만인가? 어렸을 적 TV에서 만화로 접하고 처음이다.
작년 겨울이 시작될 즈음, 같이 일하는 동료가 휴가 기간동안 보고 싶은 책 목록으로 어렸을 적 보았던 <캔디>를 적어두었다며, 다시 천천히 한 번 만화책으로 볼까 한다고 넌지시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때, 나도 문득
'아, 캔디..... 보고싶네. <칼라 애장판>으로 나왔구나. 그러고보니 구체적 스토리가 뭐였드라?' 하다, 도통 생각이 나지 않아 접어두었었다. 다만 언젠가 한가할 때 나도 한 번 읽어 봐야겠다라고 한 게, 벌써 한 계절을 건너뛰었다.
읽기 전,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내 머릿속에는 캔디의 이미지만 있을 뿐, 구체적인 스토리나 그 무엇도 떠오르지가 않는다. 막연하고 흐릿하게, 어린 마음에 아주 멋져보였던, <테리우스>의 바람에 흩날리는 듯한 검은 색 헤어스타일과 백파이프의 <안소니> 정도의 기억이 전부이다.
어른이 되어서 다시 보게 되는 '캔디'의 스토리는 어떨까?
사뭇 긴장과 호기심이 일어난다.
아련한 기억 속 '테리와 안소니', 그리고 어릴 적 화면에서 보았던 한 장면의 기억. '어디론가 막 뛰어가며 울던 캔디'의 모습을 다시 볼 생각에 가볍게 흥분된다. 그 상대역인 '이라이자'도 기대가 된다. 어렸을 적 악인의 전형으로 생각되었던 인물이다. 무엇때문에 캔디를 힘들게 했던 것이었을까?
어쨌든, 도통 생각나지 않는 기억들을 다시 재구성할 수 있는 타임이 돌아왔다. 분명 작가의 집필 의도는 어디엔가 꼭꼭 숨어 있으리라. 나는 오늘도 그것을 내 나름의 방식으로 음미하리!
미국 미시건 호수 남쪽의 작은 마을. 조그마한 바구니에 '캔디스를 부탁한다'는 쪽지와 함께 캔디는 포니의 집(교회)에 오게 된다.
고아이지만 무한초긍정 캐릭터인 말괄량이 '캔디'는 단짝 친구인 '애니'와 함께 <포니의 동산>을 뛰어다니며 행복한 나날들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날 애니는 부잣집에 입양을 가게 되고, 친구가 떠나간 뒤 홀로 남아 쓸쓸해진 캔디는, '포니의 동산'에서 울고 있다.
그 때, 스코트랜드 민속의상에 백파이프를 연주하는 '어떤 한 사람'을 만난다. 캔디가 만나게 되는 첫번째 낯선 존재로, 캔디에게 많은 환상과 동시에 절망을 딛고 일어설 꿈을 안겨주는 남자이기도 하다.
"꼬마아가씨, 웃는 얼굴이 귀여워요."
그는 이름도 알려주지 않은 체 사라지고, 마음 속에 그 말을 새긴 캔디는 언젠가 다시 볼 수 있으리란 희망으로 그가 떨어뜨리고 간 '휘장'을 소중히 간직한다.
그로부터 6년후, 캔디는 '이라이자 라건'의 말 벗으로, 그동안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행복하게 생활 할 수 있었던 <포니의 집>을 떠나게 된다.
캔디의 두 번째 이별!
캔디에게 정든 집을 떠나 새로운 환경으로 간다는 것은, 많은 두려움을 안겨주는 일이기도 하지만, 이 일로 한껏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문득 나도, 처음 고향을 떠나 독립해야 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직장을 얻게 되어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을 떠나와야 했던 그 때. 사실 난 너무나도 엄격하신 아버지 밑에서 생활하기가 때론 답답하여 독립을 얼마나 열망했던지 모른다. 그래서 짐을 싸들고 집을 떠나올 때, 얼마나 기쁘고 설레였던지……. 취업도 기쁘지만, 독립이 너무나도 기뻤던, 그 무한한 자유가 너무나 즐거웠던 이십대 중후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철없기 그지 없지만 말이다.
어쨌건, 캔디는 나와는 달리, 너무 어린 나이 15세 즈음인지라 새로운 곳을 향하는 두려움과 외로움이 컸다. 그러나 특유의 '초무한긍정마인드'로 가슴에 지니고 있는 마스코트 '휘장'을 보면서,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도 열심히 살아볼 것을 다짐한다. 당차기 그지없다. 어린 나이에 말이다.
세상에는 '나'를 시기, 질투하거나 이상하리만큼 '나'와 맞지 않는 사람들이 있듯이, 캔디 주변에도 '이라이자'와 그 오빠 '닐 ' 그리고 그 가족들이 그러하다. 전형적인 이기적인 인간형들로, 항상 뭐든지 못마땅해하며 주인공을 위기에 빠뜨릴 궁리에 여념이 없다. 그들을 통해 인간에게 있는 질투의 감정과 잔인한 면모를 잘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삶에서 비상구는 어느 누구에게나 존재하듯, 캔디에게도 그런 비상구가 생긴다.
캔디의 숨통이 트이게 만들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아드레이 집안의 세 남자'인 <안소니, 아치볼트, 아리스테아>이다.
나같으면 한 명이어도 충분할 진데, 무려 세 명이다. 개인적으로 부럽기 그지 없다.
'항상 밝게 웃는 모습이 예쁘다'며 자신이 직접 가꾼 장미꽃 중 가장 예쁜 하얀빛이 감도는 스위트 장미를 선사해주는 <안소니>,
'내가 여자 하나 때문에 걱정하다니... 발명과 기계 밖엔 몰랐는데.....'라고 혼자 읊조리는 <스테아>,
'주근깨 투성이인 그 아이, 왜 이렇게 걱정이 되지?'하며 잠 못 이루는 <아치>!
모두 애인이 되지 않는다면 '남사친'으로라도 두고 싶은 유형들이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캔디에게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큰 힘이 되어주는 또 다른 존재, 가장 든든한 비상구가 존재하는데, 바로 그가 '알버트' 이다. 캔디가 급류에 떠내려갈 때 그녀를 우연히 구해준, 바람과 같은 사람 알버트. '그'야말로 무조건적인 돌봄을 일삼는 전형적인 '기버형 인물'이다.
캔디가 어릴 때 자란 <포니의 집>선생님은 '사람에겐 각자 운명이란 게 있는 법이란다'를 말씀해 주셨다. 캔디는 입양갔던 애니를 우연히 만나게 되어 그 가르침을 다시 되새기게 된다. '각자의 운명이란 게 있다'는 문장은, 살다보면 잊어버리려 해도, 부인하려 해도 가끔씩은 맞지 않나?라는 생각이 드는 문장이다. 내 경우에도.
캔디!
캔디는 아드레이 가문의 세 남자의 노력 덕분에, 아드레이 집안에 양녀로 들어가게 되어, 그 이름 '캔디스 화이트 아드레이'를 얻게 된다.
"장미꽃을 봐. 꽃은 지기 때문에 아름답단다. 피고 지고 피고지고 하면서 영원히 사는 거지. 꽃은 져서 보다 아름답게 피고, 사람은 죽어서 사람의 마음 속에 보다 아름답게 영원히 되살아난단다."
안소니의 엄마가 생전에 안소니에게 해준 이야기다. 죽음에 대해 이리 아름다운 표현이 있던가 싶다. 그리고 꽃에 대해서도…….
문득, 올 봄에 필 꽃들을 이 관점에서 다시 음미해 보고 싶어진다.
"캔디, 그가 죽은 것을 슬퍼하지 말고, 안소니라는 멋진 소년과 만나게 된 것을 기뻐해라. 그리고, 운명이란 남에게서 받는 게 아니야. 자기 손으로 개척해야 하는 거야. 넌 일생 이렇게 울기만 할 거니? 자기 운명은 자기가 찾아야 하는 거야."
알버트는, 말을 타고 사냥을 나갔다 덫에 걸려 낙마한 <안소니>의 죽음으로 울고 있는 캔디에게 이렇게 위로한다.
캔디에겐 너무나 큰 슬픔이었으나 한편 크게 내적 성장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 후, 캔디는 연인을 잃은 슬픔을 딛고 런던으로 가게 되고, 가는 배 안에서 또 한 번의 운명적인 사랑 <테리우스>를 만나게 된다.
출생의 비밀로 내면에 깊은 슬픔을 지닌 체 살아가는 테리의 모습에서 연민을 갖게 되는 그녀.
그녀는 '슬픔을 간직한 그 차가운 눈'을 지닌 테리의 곁을 떠날 수가 없다. 그의 슬픔을 알게 되면서부터 더 더욱.
그리고 <테리>.
테리는 캔디의 마음 속에 살아있는 '안소니'를 알게 되고 그를 질투함과 동시에 '캔디 곁에 있는 것'을, '조용히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를 결국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나를 둘이서 나눈다는 건 좋은 일이군..... 너의 고민이나 슬픔을 나에게도 나눠주지 않을래?"
그러나, 함께 있던 순간도 잠시. 그는 미국으로 떠나게 되고, 배우로서의 자신의 길을 가게 된다. 캔디에게는 가슴 아픈 세번째 이별이다.
이별의 아픔을 딛고 미국 시카고에서 간호사의 길을 가기로 한 캔디.
그녀는 돌보던 환자가 죽는 것(캔디에게는 네번째 이별)을 보며, 삶과 죽음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고민을 하게 된다. 그리고 간호사라는 직업의 소명의식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된다.
"삶과 죽음을 묵묵히 바라보며, 죽는 사람이 많으니까 모두를 살려보려 하는 거야."
따끔한 병원장 선생님의 충고를 들으며 간호사로서 자신이 가야할 길에 대해, 보다 더 확신과 신념을 갖게 되는 캔디.
"앞으로도 많은 환자들의 죽음을 보게 될 거야. 그리고 그 때마다 슬퍼지겠지. 하지만 그 슬픔을 모두 이겨야 해. 모두 그렇게 살아가겠지. 훌쩍 거리고 있을 순 없어. 자기 길을 똑바로 가야 해."
이렇게 캔디는, 나날이 슬픔을 딛고 '깊이 있는 인간'으로서 성숙해 간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전쟁, 즉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된다. 캔디는 동료이던 프라니가 종군 간호사로 지원하게 되는 과정을 지켜보다가, 간호사라는 직업으로서의 엄격함과 소중함을 깨닫고 더욱 공부에 정진, 견습생에서 정식 간호사 자격을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알버트!
이탈리아 격전지에서 후송되어 온 기억상실증 환자로서 캔디가 근무하는 병원에 오게 된다.
알버트는 캔디가 모든 자신의 비밀을, '삶의 슬픔과 두려움과 사랑, 외로움 등' 무슨 고민이든 다 털어놓을 수 있는 비상구 같은 존재이다. 항상 캔디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격려를 해 주는 따뜻한 엄마와 같은 존재로, 그녀 곁에 그림자처럼 늘 함께 하는 인물이다.
캔디는 그런 그이기에 아주 정성껏 간호를 한다. 그동안 알버트에게 진 마음의 빚을 다 갚을 요량으로!
한편, 테리…….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배우로서의 길을 가게 된 테리는, 어머니의 배우유전자를 이어받아 출중한 배우로서 성공적인 길을 가게 되나, '스잔나'라는 가혹한 운명 앞에 사랑의 발목을 잡히게 된다.
그리워하던 캔디를 눈앞에 두고 그는 절망한다.
"납처럼 팔이 무겁다. 이 무게를 이젠 벗어날 수 없단 말인가?……."
공연 도중 부상으로 테리 대신 다리를 잃게 된 스잔나를 팔에 안아 이동시키면서 독백으로 쏟아내는 테리의 대사이다.
작가의 멋진 표현에 잠시 책장을 넘기던 손길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멋진 대사이다. 테리의 운명을 저 문장으로 모두 함축시켰다.
그렇게 캔디는 또 다시 가슴 저리게 다섯번째 이별을 맞이한다.
사랑하는 테리를 가슴에 품고 눈물로 돌아서야 하는 상황은, 우리 인생에서 한 번 쯤은 꼭 겪게 되 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짙은 상처'가 아닐까 싶다.
한편, 스테아도 전쟁에 공군으로 자원을 해 출격하게 된다. 비행기를 좋아하던 스테아는 '캔디가 행복해지는 기계'를 발명해 선물로 주고 떠난다. 그리고 전쟁터에서 프랑스군으로 활약하지만, 결국 죽음으로 가족들 곁에 돌아와 슬픔을 안겨주게 된다. 전쟁의 무자비함을 일깨워주는 장면이다. 이것이 캔디의 여섯번째 이별이 된다.
그리고, 다시 캔디.
캔디는 시골 마을인 자신의 고향 <포니의 집>으로 돌아가 그 곳에서 간호사로서 살아가기로 다짐한다.
도착하자마자 단숨에 뛰어 올라가 본 포니의 동산.
<안소니>와 <테리>를 떠올리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그녀에게, 그동안 애타게 그리워했던 어린 시절 들었던 위로의 목소리가 꿈처럼 다시 들리게 된다.
"여어, 꼬마아가씨, 웃는 얼굴이 더 예뻐"
다정한 목소리와 그 금빛 머리칼을 드디어 보게 된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한껏 뛰어가는 캔디……. 이제서야 진정 울지 않는 캔디의 얼굴이 클로즈업 된다. 끝이다.
그가 누구인지는 충분 짐작하고도 남으리라.
너무나 많은 이별과 시련앞에 서있는 캔디를 보며, 한없는 가엾음으로, 읽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여섯 권을 보는 동안 이리 내리 울긴 처음이다. 눈이 탱탱 부었을 정도다.
어릴 적 기억으론 마냥 재밌었던 기억밖에 없거늘, 내가 기억하는 캔디는 그 캔디가 아닌 것 처럼 느껴진다.
산다는 것은 끊임없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뜻대로 되지 않는 사랑앞에서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도 되고, 느닷없이 닥치는 이별의 순간앞에서는 당혹감과 두려움을 아무렇지 않은 듯 마냥 놓을 수만도 없다.
그 어떤 시련이 있어도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야 하는 게 우리의 인생이라는 생각이다.
그 힘든 고독의 길에서, 아무런 댓가나 그 무언가를 바라지 않고 마냥 지지해 줄 '알버트와 같은 비상구'를 자신의 곁에 둘 수 있다면, 그 '인생길은 간간 휘파람을 불며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괴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어릴 적 TV로 <캔디>를 볼 때, 중간 중간 흘러 나오던 주제곡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이 책을 다시 보기 전, 내 머릿 속에는 막연하게 '슬퍼도 늘 쾌활하고 잘 참았던 캔디'가 씩씩하고 마냥 좋아 보여, 취미활동으로 노래를 잠시 불렀을 때 나의 닉네임으로 사용한 적이 있다. 그런데 막상 캔디를 다시 읽고 나니, 그 이름을 쓰고 싶지가 않아진다. 이제는 이름만 들어도 너무 슬퍼져 버린다.
나는 사실 내색을 잘 하지 않는다. 힘든 일, 어려운 일, 모두 잘 참는다. 그래서 나름 '인내력 끝판왕'이다.
하지만 참는다는 것, 그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 보게 하는 만화 <캔디캔디>다.
그래서였나? 모든 것을 너무 잘 참는 캔디가 한편 내 모습같아서 그리 눈물이 났던건가??
하여간, 내 슬픔을 참고, 내 운명을 받아들이고, 초무한긍정으로 묵묵히 무장하여 재정비하고 살아가는 게 과연 바람직한 일인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를 생각해보게 하는 <캔디캔디>다.
따사로운 봄 햇살과 어울리지 않게 너무 슬픈 주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