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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는김작가 Jun 28. 2016

「소리 없는 폭력에 상처받지 않은 이, 그 누구인가?」

#35. '채식주의자'를 통한 한강의 울림.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에 맞을까요? 기괴하고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내용인데,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소화할 수 있을까요? 책 판매가 엄청나다는데, 우리 민족 특유의 냄비 근성 같은 거 아닐까요? 상을 받았다고 하니까 일단 사고 보는...."



친한 동료의 발언이다.

요즘 회자되고 있는 '한강'의 소설을 읽었느냐고 물었더니 이리 긴 한탄과 같은 답변이 이어진다. 본인도 읽어보았는데 역시 상식 밖의 이야기에 좀 납득하기 어려웠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렇다면?

나로선 더더욱 호기심이 일렁인다. 요즘 직장은 한창 대목이라고나 할까, 할 일이 태산이라 퇴근하고 돌아오면 피곤에 지쳐 시도 되지 않아 잠들기 바쁜 나날인데, 더 미룰 수가 없다.

잠시 모든 일과 잠을 밀쳐두고 책을 붙잡았다.

한 장 넘기는 순간, 나도 모르게 후딱 읽게 된다.





생각보다 속도가 빨랐다. 문장이 난해하지는 않은 터라 금방 읽을 수 있었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 최근 상영 중인 '아가씨'의 원작 '핑거 스미스'를 읽었었다. 800여 쪽이 넘는 분량에다 어딘가 모르게 집중을 해야 하는 문장 표현들이 많아서 속도를 내기엔 무리였다. 좀 터덕거렸다. 내용도 약간 심오한 부분(내가 느끼기에)이 있어 고심하면서 읽었다.



그랬던 거에 비하면, 채식주의자는 분량과 단순 읽기 측면에만 본다면 속칭 '누워서 떡먹기'다. 아마 책을 좀 좋아하는 이들이면, 그 어느 누군가가 읽어 본다 치더라도 두서너 시간이면 가능하리라.



단문 위주로 명징한 문장들이다.

작가의 상상력과 표현력이 좋고, 글을 읽게 만드는 흡입력이 탁월하다. 그러나, 소설의 내용 측면에서 본다면 결코 속도를 낼 수 없는 책이다.

우리는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겨야 한다.



작가는 살아오면서 쓰윽 지나치고 넘겨버렸던, 아니 지금도 쓰윽 지나쳐버리고 외면해 버리는, 혹은 외면당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바쁜 일상에 무디어진,

그런 '인간의 폭력성'을 돌아보게 만드는 소설이다. 그래서 한강의 울림은 의미롭다.



          

                                                                                                                                  

'채식주의자'는 2002년 겨울부터 2005년 여름까지 발표한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을 엮은 연작소설이다.  긴 시간에 걸친 만큼 고심했을 작가의 심적 무게가 상상되어진다.



'채식주의자'는, 주인공 영혜를 바라보는 남편의 시선으로, '몽고반점'은 영혜의 형부 시선으로, 마지막 '나무 불꽃'은 영혜 니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1. 채식주의자


말수가 적은 영혜.

결혼 5년 차 영혜의 남편은, 그녀와의 첫 만남에서 그녀에게 끌리 않았다고 솔직히 고백한다. 개성 있어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한 무채색의 옷차림의 그녀를 보며, 특별한 매력이 없는 것처럼 특별한 단점도 없어 보여서 무난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런 그의 판단과 선택대로 평범한 결혼생활이 이어졌고,  또한 아마도 한 남자의 아내로서 너무 과하지도 너무 부족하지도 않았으리라.  



그러던 어느 날, 어두운 숲에서 자신의 옷에 피가 묻어있는 꿈. 헛간에서 떨어진 고깃덩어리를 주워 먹었다는 영혜의 꿈 이야기와 함께 육식을 거부하는 영혜의 행동은, 남편에게 평온한 자신의 삶을 뒤흔든 사건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난 무서웠어. 아직 내 옷에 피가 묻어 있었어..... 내 손에 피가 묻어 있었어. 그 헛간에서 나는 떨어진 고깃덩어리를 주워 먹었거든. 내 잇몸과 입천장에 물컹한 날고기를 문질어 붉은 피를 발랐거든. 헛간 바닥, 피 웅덩이에 비친 내 눈이 번쩍였어..... 그렇게 생생할 수 없어. 이빨에 씹히던 날고기의 감촉이. 내 얼굴이, 눈빛이,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내 얼굴이 아니었어.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생생하고 이상한, 끔찍하게 이상한 느낌을.'



영혜의 꿈 이야기를 듣고도 도통 무슨 이야기인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영혜의 남편은 이내 당혹스러운 여러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 그녀를 한 번도 진심으로 이해해 보려 시도하지 않는 영혜의 남편.

결국 처갓집 식구들의 힘을 빌려 아내가 육식을 거부하게 된 그 이전, 원래의 평온한 자신의 일상상태로 모든 것을 되돌리고자 한다. 하지만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모든 상황은 악화되기만 한다.



영혜의 친정 식구들조차 진심으로 그녀 이해하고자, 그녀의 내면을 알고자 어느 누구도 시도하지 않는다. 그저 상식적인 선에서, 우리가 살면서 알게 모르게 배워온 규범과 제도의 틀 안에서 온갖 겉도는 치유책만이 난무한다.

누구도,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받아온 여러 트라우마들이 계속 고개를 쳐들어 힘든 상태인 영혜를 알지 못한 체 말이다.



그리고, 영혜의 남편!



단 한 번도 영혜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지 못한, 그녀의 내면 따위는 알 길이 없다고 치부해 버린, 알고 싶지 않은 아내의 꿈과 고통을 그렇게 영혜의 남편도 외면한다.

지금까지 결혼한 후, 5여 년 간을 같이 살아왔고 지금도 함께 살고 있으니, 그 누구보다 아내인 영혜를 가장 잘 이해하고 알아야 할 남편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그녀를 전혀 알지도, 이해하지, 아니 이해하려 시도조차 하지 않는 영혜 남편의 모습에서, 자신의 편의대로 이기적 욕망만을 추구하는 인간의 '소리 없는 폭력'을 느꼈다.




2. 몽고반점



이 작품은 발표 당시 '이상문학상'을 수했다.



<비디오 아티스트>'영혜의 형부'등장한다.

형부는 원초적 미를 되찾고 싶어 하는 예술가로 묘사된다.

가정을 꾸리고 지키기보다는 늘 자신의 작품세계 구현에 몰입해있는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 처제이지만, 영혜에게 있는 '몽고반점'은 바로 '태고의 순수성'을 떠올리게 하며, 어떤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그는, 육식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사회와 가족, 남편에게 외면당한 체 홀로 조용히 지내는 처제를 자신의 비디오 아트 작품 소재로 활용하기에 이른다.

그는 약간의 고민과 망설임 끝에, 자신의 망과 예술가로서의 영감에 따른 구상을 토대로 자신만의 '예술작업'을 추진한다. 자기자신의 온 몸과 영혜의 온 몸에 보디페인팅을 한 후, 결국 사회적 금기를 넘어서는 상황을 만들어가면서 본인의 예술작품을 완성한다.



육식없이 나름 자유로이 살아가고 있던 영혜의 모습은, 나무처럼 메말라가긴 했으나 오히려 지극히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느낌을 안겨주었다. 그렇게 그대로 별탈없이 잘 지낼수 있을 것 같던 영혜는 그런 형부로 인해 새로운 파국을 맞이한다.

여기에서 두 번째로, '인간의 소리 없는 이기심에서 오는 욕망과 그  '을 생각해 보았다.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 세계의 완성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는 남편의 행동은, 아내로 하여금 결국 정신병원으로의 호송을 요청하게 만든다,

어찌 보면 기괴한, 도저히 정상인(과연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은 무엇으로 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는 지점이긴 하나)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사회적 규범 안에서는, 다시 말해 평범한 생활인의 상식 안에서는 한없이 틀을 벗어난 비상식적인 행동일 뿐. 소통의 부재만이 있을 수밖에 없는 비이성적 행위로 비춰질 뿐이다.

어쨌건 그 결과는, 현적으로 영혜의 언니에게 가해지는 '무책임하고 소리 없는 폭력'되어버렸다.



'먼저 그녀의 어깨까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목덜미에서부터 꽃을 그리기 시작했다. 자주와 빨강의 반쯤 열린 꽃봉오리들이 어깨와 등으로 흐드러지고, 가느다란 줄기들은 옆구리를 따라 흘러내렸다. 오른쪽 엉덩이의 둔덕에 이르러 자줏빛 꽃은 만개해, 샛노란 암술을 도톰하게 내밀었다. 몽고반점이 있는 왼쪽 엉덩이는 여백으로 남겼다. 대신 그 푸르스름한 점 주변으로 그보다 흐린 연둣빛을 큰 붓으로 깔아, 연한 꽃잎 그림자 같은 반점이 도드라지게 했다.'



예술적 영감과 자신의 욕망 사이에 들뜬 형부가  영혜의  몸에 꽃그림을 그리이다.

작가의 묘사가 매우 생생하여 내 머릿속에 강렬한 이미지로 아직도 남아있다.



3. 나무 불꽃


그렇게 남편으로부터 소리 없이 다가온 엄청난 폭력으로 만신창이가 된, <영혜의 언니>가 등장한다.



'그녀는 아주 젊지 않다. 딱히 미인이라고 부르기도 어렵다. 다만 목선이 고운 편이고 눈매가 서글서글하다..... 누구에게든 호감을 줄 법한 그 단정한 인상 덕분에, 희미하게 얼굴에 배어 있는 그늘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스스로 감당할 줄 알았으며, 성실은 천성과 같았다. 딸로서, 언니나 누나로서, 아내와 엄마로서, 가게를 꾸리는 생활인으로서, 하다못해 지하철에서 스치는 행인으로서까지 그녀는 최선을 다했다. 그 성실의 관성으로 그녀는 시간과 함께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영혜의 언니'는 묘사되고 있었다.



이 인물은 보는 순, 나도 모르게 나 자 떠올렸다.

묵묵한 그녀의 생각과 행동들!

'어디에나 흔하게 있을 법한 그녀'에 대한 작가의 예리한 묘사들은, 어쩌면 결혼한 여성들이 지니고 있는 공통된 일면이 아닐까 싶었다.

착잡함과 연민이 교차했다.

'수많을 그녀'에 대한 애잔함에 가슴 한 켠이 아린다.  



'결코 관통할 수 없을 것 같은 침묵에 싸여 있던 남편의 실체를 과연 만난 적이 있었던가를 떠올리며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는 그녀.

자신의 가게에 애프터 세이빙 로션을 사러 들린 손님이었던 그를, 점심도 거른 체 자신의 일에 빠져 피로한 그를 그녀는 자신의 힘으로 쉬게 해주고자 했다.

언제나 바쁜 그를, 어쩌다 집에 머물러 있는 시간에도 마치 여관에 든 여행자처럼 서름서름해 보였던 그를 쉬게 해주고 싶은 그녀였으나, 이제 한 발 떨어져 생각해 보게 된 그녀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그녀가 간절히 쉬게 해주고 싶었던 사람은 그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열아홉 살에 집을 떠난 뒤 누구의 힘도 빌지 않고 서울 생활을 헤쳐나온 자신의 뒷모습을, 지친 그를 통해 그저 비춰보았던 것뿐 아닐까.'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애정을 확신하지 못하는 것처럼, 남편도 그녀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었다.



'당신은 나에게 과분해.'

결혼 전에 그는 말한 적이 있었다.

'당신의 선량함, 안정감, 침착함, 살아간다는 게 조금도 부자연스럽지 않아 보이는 태도.... 그런 게 감동을 줘.'



그녀 남편의 독백 같은 고백이다.

비디오 아티스트로서 자신의 예술적 세계를 추구하느라 여념이 없는 남편이 사랑한 것은, 어쩌면 그가 찍은 이미지 들이거나, 그가 찍을 이미지들뿐이었을 것이라고 그녀는 담담히 말한다.  



그런 그녀는, 육식을 거부하다 거의 말라죽어가는, 나무가 되고 싶다고 이야기해대는 동생 영혜를 보살피는 중, 자신의 인생과 영혜와 얽힌 어린 시절 추억들을 곱씹어 보게 된다. 그 과정은 바쁜 일상에 제쳐두었던 자기 자신과, 이해할 수 없었던 '동생 영혜'를 보다 잘 들여다볼 수 있는 통역할을 하게 된다.



'아버지의 손찌검은 유독 영혜를 향한 것이었다. 영호야 맞은 만큼 동네 아이들을 패주고 다니는 녀석이었으니 괴로움이 덜 했을 것이고, 그녀 자신은 지친 어머니 대신 술국을 끓여주는 맏딸이었으니 아버지도 알게 모르게 그녀에게만은 조심스러워했다. 온순하나 고지식해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던 영혜는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고, 다만 그 모든 것을 뼛속까지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안다. 그때 맏딸로서 실천했던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

막을 수는 없었을까. 영혜의 뼛속에 아무도 짐작 못할 것들이 스며드는 것을......'



그리고 그녀는 불현듯 자신의 결혼 생활 중,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느꼈던 때를 기억해 내곤 몸서리친다. 어쩌면 그리고 어쩌면 나무가 되고 싶다는 영혜보다, 더 강렬하게 어느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않는 나무가 되어야 할 사람은 영혜의 언니일지도…….



'이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

 더 앞으로 갈 수 없다.

 가고 싶지 않다.'


'지금 그녀가 남모르게 겪고 있는 고통과 불면을 영혜는 오래전에, 보통의 사람들보다 빠른 속력으로 통과해, 거기서 더 앞으로 나아간 걸까. 그러던 어느 찰나 일상으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끈을 놓아버린 걸까. 잠을 이루지 못한 지난 석 달 동안 그녀는 이따금 혼란 속에서 생각해왔다. 지우가 아니라면 -그 애가 지워준 책임이 아니면- 자신 역시 그 끈을 놓쳐버릴지도 모른다고.'



그리하여 영혜의 언니는, 자신도 때론 아이가 아니었다면 삶의 줄을 그만 놔버리고 싶었던 적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영혜를 마음속 깊이 헤아려보게 되고 동생의 생각과 행동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아울러, 자신의 가슴에 잠들어 있던 내면의 상처들을 모두 꺼내 성찰해 봄으로써,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할 수 있는 계기를 갖는다.  







영혜와 영혜 언니를 통해, 한껏 쓸쓸하고 애잔한 인생을 엿보았다.

우리의 삶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쉽게 드러내지 못하는, 어쩌면 애써 재껴 숨겨둔 어느 아픔 한 부분을 훔쳐본 듯하다.



덮으며, 책 표지 그림(에곤 실레의 작품) 중, 앙상한 잎을 지닌 한 그루의 나무가 '나' 는 아닌가 되짚어본다.



주변에 혼재하는 많은 공격성.

나의 정서와 일치하지 않거나 잘 맞지 않는하여 쉽게 행해지는 타인들의 무심한 언어와 행동과 강요들. 그리고 거대 사회가 되어가면서 아무렇지 않게 만연되어 가끔 개개인을 옥죄어오는 여러 불합리한 사회적 관행들. 그 안에서 우리의 순수성과 존재의 본질적 가치가 훼손되는 일들은 얼마나 비일비재한.



'소리 없는 폭력들' 앞에서 한없이 나약할 수밖에 없 그 누군가는, 항상 아파할 수밖에 없는 약자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혹, 그 소리 없는 폭력의 주체가 '나'는 아닌지 곰곰 돌아봐야 할 일이다.



소리 없는 폭력에 상처받지 않은 이, 그 누구인가!



생각할수록 먹먹하다.


소리 없는 폭「소리 없는 폭력에 상처받지 않은 이, 그 누구인가?



                                                                                                                                                                                                                                                                                                                                                                                           

P.S: 대문 사진은 <제주청년작가전ㅡ제주를 비추다, 제주현대미술관 > 전시회 관람 중 찍은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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