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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는김작가 Jul 03. 2016

「물은 언제 뜨거워지는가」

#36. '송재학'님의 시 ㅡ 「문학동네 2016 봄」에서


물은 언제 뜨거워지는가



송재학




종일 비가 와서 바깥은 경극의 배경과 어울렸다 찻잎을 물에 띄울 때 고요의 눈썹은 내가 그린 듯 가깝다 먹구름과 싸우면서 제 높이를 슬슬 키웠던 능선 그림자도 한 움큼 불러 물에 담갔다 물은 언제 뜨거워지는가 물이 쉽게 끓기나 할까마는 물이 펄펄 끓으면 영혼은 현실과 마주친다 양철주전자가 물의 온도에 접근하면서 마침내 쇠붙이까지 물의 감정을 읽을 수 있게 된다 주둥이에서 쇄쇄 김이 올라오고 때마침 뚜껑은 들떠서 십 리쯤은 도망갈 기세이다 물도 주전자도 뜨겁다고 뜨거워 못 견딘다고 이제 너희가 외쳐라







정말, 시에서처럼 종일 비가 온다.

장맛비가 맞는구나 싶을 만큼 한참을 옴팍, 먹구름 모두 모아 세차게 쏟아붓는다. 마치 꼭 이번에는 단단한 아스팔트를 뚫고 들어가겠단 듯이.

 아스팔트 틈 사이 빼꼼 내민 어느 이름 모를 풀뿌리의 끝자락을 찾아내 오랜 목마름을 흠뻑 적셔주면서, 내 널 향한 끝나지 않은 사랑을 보여주고야 말겠단 듯이.



그러다 이내 또 거짓말처럼 살랑곰살맞게 살랑 내 바짓단에도, 팔의 맨살갗에도, 살랑살랑 여린 비가 나린다. 

그간의 갈증, 그 오랜 기다림에 지쳤던 마음 살포시 토닥거려주려는 듯이.

그간의 그리움, 그 오오래 애타던 마음 부드러이 어루만져주려는 듯이.



그렇게 비가 종일 거세게도 여리게도 오락가락…. 

주어진 삶에 버벅거리고 어쩌다 오고가는 사랑에 터덕거리는 늘 아마추어인 나처럼, 종일 오락가락한다.





'커피보다 녹차'

나는 원래 쌉싸래한 녹차를 좋아한다.

연노란색으로 우러난 찻물이 잘 보이도록 흰 색의 커다란 머그잔에 서너 개의 녹차잎을 고, 끓인 물을 한 뜸 식혀 부어준다. 그리고 잠시 찻잔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걸 바라보면서, 조용히 기다린다. 

그사이 분주했던 내 마음이 나도 모르게 가라앉고, 바싹 말라있던 찻잎은 따뜻한 물 위에서 점점 펴져 옅은 노란색을 피우기 시작한다. 이내 온통 밝디 밝은 노란 빛 세상 천지가 된다!



적절한 온도의 물로 잘 우려낸 녹차 한 잔

그 차를 입 안 가득 머금어본다. 은은하기 그지없다. 옅은 부드러움과 함께 혀를 감싸는 쌉싸래함이 끝맛으로 따라온다.

은은함과 부드러움, 쌉싸래함의 조화! 코 끝에 밀려오는 녹차향을 가득 안고 그렇게 입 안에 다양한 맛들을 음미하는 순간은, 내 온 몸과 마음도 연노란빛으로 환히 물든 듯 하고 일상의 부질없는 상념들은 휙휙 다 사라져버린다.

이것이 내가 녹차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찻잎을 물에 띄울 때 고요의 눈썹은 내가 그린 듯 가깝다. '



고요의 눈썹이라니, 너무나 매혹적인 표현이다.

한 번도 찻잎을 '눈썹'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거늘, 게다가 '고요의 눈썹'이라니……. 시인의 날카로운 착상이 놀랍고 탁월한 시적 표현이 마냥 부럽기만 하다.



시를 읽는 동안 나도 모르게 '눈썹 같은 찻잎'이  자동적으로 떠오른다. 바싹 말라있었던 찻잎들이 물 위에서 빙빙 돌다 서서히 꽃이 피듯 펼쳐지는 장면을 놓치지 않고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 순간은 너무나 평온하다. 지극한 선의 경지이다. 정신없는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호흡을 고르기에 아주 충분한 고요의 시간, '고요의 눈썹' 그 자체다.





'물은 언제 뜨거워지는가 물이 쉽게 끓기나 할까마는 물이 펄펄 끓으면 영혼은 현실과 마주친다'



사실 이 구절은 알 듯도 모를 듯도 하여 이해하기 어려웠다. '영혼이 현실과 마주한다'라니…….

그런데, 그 심오한 의미를 알아채기도 이전에 이미 내 머릿속에는 자동적으로 다른 생각들이 스쳤다.



'나는 언제 뜨거워지나…….'

'그래, 물이 쉽게 끓기나하던가…….'



그리하여 갑작스레 나를 다시 돌아보건대, 아무래도 나는 그간 삶이 주어진 대로 묵묵히 걸어오기만 한 듯 싶다. 미친 듯 내가 좋아서 그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그 선택에 몰입해서 진정으로 뜨겁게 끓어오른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를 반문해본다. 역시 이 질문, 답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오직, 여기 지금 서있는 자리가 아닌 더 나아보이는(착각일 수 있겠으나) 다른 자리를 엿보며 그들이 끓어오르는 것을 부러워 하면서 '나는 도대체 언제쯤......'을 막연히 열망해왔음만을 명백히 기억해낸다.




'주둥이에서 쇄쇄 김이 올라오고 때마침 뚜껑은 들떠서 십 리쯤은 도망갈 기세이다 물도 주전자도 뜨겁다고 뜨거워 못 견딘다고 이제 너희가 외쳐라'




문득 어쩌면 '바로 지금' 이 내게 그 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뚜껑을 들뜨게 하는, 주둥이에서 쇄쇄 김이 올라오는 그 한없이 뜨거워지는 순간 말이다.  

'언제, 도대체 어디쯤' 하며 현재의 내 모습을 늘상 못 미더워하고, 때로는 완벽주의자가 되야 할 것처럼 스스로를 못살게 굴면서 늘 뭔가를 바라기만 했으나, 어쩌면 바로 지금이 펄펄 끓는 그 지점에 서있는 듯도 하다.


나는 오늘도, 한 편의 낯선 시를 읽다가 그 시에 퐁당 빠져서 인생을 생각하다 지나온 내 인생도 다시 더듬어보았다. 그러다 이런 저런 씁쓸함을 안고 하염없이 창 밖에 떨어지는 비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또 이리 쓱쓱 뭔가를 글로 써 내려가는 중이다. 그런데 이리 글을 쓰는 일이 참, 즐겁다!


시인의 시에 나를 비유컨대,


'가슴 한 켠'에서 쇄쇄 '어떤 울림'이 올라오고, 때마침 '감성'은 들떠서 이미 십 리쯤은 앞서 내달음질 치고 있고, '내 마음'도 '짙은 감성'도 뜨겁다고 뜨거워 못 견딘다고 이리 계속 외쳐대 글로 쏟아지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진정 뭔가를 쓰지 않고 견디기에는 좀 뜨거운 지금! 나름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에서 끓고있는 중>이다.






그동안 저 너머에 있을 것만 같은 파랑새를 쫓아 허덕이고 갈증만을 내면서 살아온 것은 아닐까 되짚어본다.

'현재의 나'는 갑작스레 쓰게 된 글쓰기의 매력에 함빡 홀려 그 속에서 새로운 즐거움을 맛보고 있는 중이다. 때론 글의 표현이 서투르고 내 이야기를 쓴다는 게 부끄러워 고민되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해 왔던 그 어떤 일보다 매혹적이다. 



내겐 바로 이런 지금이, 어쩌면 늘상 바라마지 않던 '그 어떤 뜨거움'의 순간이란 생각이 든다.

100도는 언제쯤일까? 하고 그리워만 했던 그 지점이 지금 일 수도 있음을 그간 깨닫지 못했다. 팔팔 끓는 100도의 순간이란 어떤 눈에 보이는 커다란 결과물이 있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런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늘 쫓기듯, 위만 바라보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다. 

하지만, 그저 이렇게 한 편 한 편 소소히 글을 써 나가는 지금 이 순간들이 충분 100도의 뜨거움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뜨거움을 감지하는 감각은 개인마다 온도차가 있기 마련 아니겠는가! 



또 인생에서 우리는 꼭 뜨거워야만 하는가? 누군가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러고 보니 그것도 혹 어떤 이에게는 전혀 필요없을 수도 있겠다. 

그러니 뜨거운 상태를 너무 과하게 추구할 일만도 아니다. 그저 좋아하는 일을 향한 뜨거움은 적절히 삶을 즐길 수 있을 정도의 온도, 자신의 삶을 활기차게 가동할 활력소가 될 정도의 온도이면 그만이리라.

 


그러니 자신의 마음 속에 담긴 그 무언가를 향한 '그 어떤 뜨거움'을 찾아내 '자신만의 적정 온도'로 끓이는 작업이 필요하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꼭 물리적인 끓는 점 100도의 상태까지 올라가지 않더라도,  그 100도 만이 유일한 끓는 점이라는 강박관념은 버리고 자신만의 적정 온도로 즐겁게 살아갈 일이다. 너무 뜨거운 100도의 물은 오히려 차의 쓴 맛만을 강하게 안겨주지 않던가. 100도가 아닌 한 뜸 식힌 적정 온도의 물로 내린 커피가 훨씬 풍부한 바디감을 안겨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만 주의할 점은, 그 '어떤 뜨거움'은 정녕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어야 한다는 것. 자신이 최고로 좋아하는 일에 즐겁게 몰입하되 100도가 아닌 자신만의 취향이 반영된 온도가 바로 뜨겁게 팔팔 끓는 점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남과 비교할 것도 없이, 저 멀리 파랑새를 찾으러 갈 필요도 없이 말이다. 



자신만의 끓는 점을 찾아 그 안에서 느긋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맛과 멋을 즐기기.

이것을 방심하다간 내가 이미 뜨거운 지점에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음을, 나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풍부하고 깊은 맛이 신기루처럼 후우 사라질 수도 있음을 명심, 또 명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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