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김용택'님의 시집 '속눈썹'을 바라보며 되뇌인 말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
아재 개그를 할 것 같은 중년의 아저씨같은 시인.
시골 사람들의 투박한 듯하면서도 소박한 입담 같은 김용택 시인의 자연스러운 시를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한없이 푸근해지고 어린애마냥 순수해진다. 시인의 마음이 얼마나 여린지, 또 얼마나 투명한지를 가늠해보게 한다.
‘시골에 있는 서재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문학공부를 시작할 때부터 1980년대까지 사회인문학 서적들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거기는 방에 책이 가득 들어있는데, 그 방이 서재라기보다도, 제가 살고 있는 진메마을이라는 작은 마을 자체가 저에겐 큰 서재였던 셈이죠. 강이라든가, 산이라든가, 마을사람들이라든가, 농사짓는 모습이라든가, 그런 자연 자체가 저에겐 책과 함께 서재였죠.’ -< 지식인의 서재, 네이버 >
그 구례 섬진강의 잔잔하고도 긴 강줄기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섬진강을 하루도 안 보고 산 적이 없다고 하는 시인.
그저 누워있으면 강 자체가 자신의 핏줄처럼, 자신의 몸을 지나가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든다는 시인의 말에서, 시는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체득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자유롭고 싶어. 좌파, 우파, 보수, 진보 같은 낡은 이념 속에 갇히기 싫어. 난 그저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사람. 삶을 정직하고 진지하게 사는 사람. 너도 살고 나도 사는 상생의 가치를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 자연의 순리를 어기지 않는 사람. 그런 세상이 되기를 바라고 난 그러고 싶은 사람이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중에 난 좋은 놈! 허허’ -< 월간 사람과 산 >
갈수록 신문을 읽기가, 뉴스를 보기가 두려워지고 머리가 지끈거려지는 현실 속에서 더욱 더 절실하게 다가오는 울림이다.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돌아가야 할 내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 지를 생각해 보게 한다.
「속눈썹」
산그늘 내려오고
창밖에 새가 울면
나는 파르르
속눈썹이 떨리고
두 눈에
그대가 가득 고여온답니다.
「가뭄」
해는 지고
산은 눕는데
내 시 드릴 이는 어디 있는고.
아버님은 봄갈이 해 놓은 논두렁에 서서
논도 이따금 이렇게 바싹 말려야 한다고
하셨다.
「현기증」
몽롱해집니다
피곤하고 졸리운데
당신이 내 가슴에 한없이 파고드시니
대체, 여기는 어디랍니까.
「지금」
지금 내 곁을 스치는
작은 바람결에도 나는 당신을 봅니다.
봄바람인걸요.
지금 내 곁을 스치는
작은 바람결에도 나는 당신을 봅니다.
꽃이 핀걸요.
지금 내 곁을 스치는
작은 바람결에도 나는 쓰러집니다.
당신인걸요.
「나를 잊지 말아요」
지금은 괴로워도 날 잊지 말아요.
서리 내린 가을날
물 넘친 징검다리를 건너던
내 빨간 맨발을
잊지 말아요.
지금은 괴로워도 날 잊지 말아요.
달 뜬 밤, 산들바람 부는
느티나무 아래 앉아
강물을 보던 그 밤을
잊지 말아요.
내 귀를 잡던 따스한 손길,
그대 온기 식지 않았답니다.
나를 잊지 말아요.
「입맞춤 」
달이 화안히 떠올랐어요.
그대 등 뒤 검은 산에
흰 꽃잎들이 날았습니다.
검은 산 속을 나와
달빛을 받은
감미롭고도 찬란한
저 꽃잎들
숨 막히고, 어지러웠지요.
휘황한 달빛이야 눈 감으면 되지만
날로 커가는 이 마음의 달은
무엇으로 다 가린답니까.
「그러면 」
바람 부는 나무 아래 서서
오래오래 나무를 올려다봅니다.
반짝이는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
그러면,
당신은 언제나 오나요?